다음은 Pier Vittorio Aurelli 의 The Possiblity of an Absolute Architecture 의 5 장 The city within the city 을 번역하여 옮긴 글이다.
5. The city within the city
5. The city within the city
Oswal Mathias Ungers, OMA, and the project of the city as archipelago
1970년대, 서베를린은 지속적인 도시 환란을 겪었다. 2차 세계대전의 파괴에 뒤따라서, 독일의 분단은 두 개의 적대적 블록을 만들었고, 장벽은 베를린을 자유민주진영의 독일 수도인 동베를린, 그리고 서독의 열한 번째 주인 서베를린, 이렇게 두 개의 도시로 나누어놓았다. 그리고서 베를린은, 적대적 영역으로 둘러싸이고 벽으로 에워싸인 도시 상태, 일종의 섬의 상태가 되었다. 1970년대 서베를린은 전후 환란에서 회복되지 않은 채 도시는 아직도 섬처럼 보이는 건물들만이 놓인 많은 공터를 가지고 있었고, 인구는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1977년 건축가 그룹은 “ Berlin as a Green Archipelago”라고 불리는 도시 회생 프로젝트를 발족시켰다. Oswald Mathias Ungers, 에 의해 이끌어진 이 건축가 그룹에는 Rem Koolhaas, Peter Riemann, Hans Kollhoff, 그리고Arthur Ovaska 가속해 있었다. 이들 건축가 들어게 전후 서베를린의 문제점은 “도시 안의 도시” 혹은 웅거스의 말로 “ 섬으로 만들어진 도시” 의 잠재적 모델이 될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믿어졌다. 이러한 접근은, 먼저 그가 베를린 기술 대학(1963-1969)에서 그리고 그 후 코넬 대학교(1968-1986)에서 교수 생활했던 1964년부터 1977년 사이에 그의 학생들과 진행한 도시 프로젝트의 강력한 개념을 반영했다. 웅거스는 경제적 어려움에 빠져있고 정치적으로 나누어진 베를린의 색다른 성격을 당시에 팽배했던 기술적이고 낭만적인 접근에 맞서서, 실험적 도시 프로젝트로 바꾸려 했다. Berlin as a Green Archipelago는, 1980년대와 1990년대 때 베를린 재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Krier 형제의 주변 블록 제 생에 대한 초기의 비판으로 이해될 수 있다.
Berlin as a Green Archipelago는 포커스를 도시화 문제 (도시의 지나친 팽창)에서 도시의 축소화 쪽으로 급진적으로 바꿈으로써 도시의 문제를 환기시키는, 도시계획의 역사에서 정말 보기 드문 경우의 프로젝트 중 하나이다. 웅거스의 군도계획은 인구의 공동화의 과정을 받아드림으로 해서 계획의 틀을 잡고 도시의 형태를 만들었다. 이런 동의는 결코 “비 도시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 규모의 인공물로서의 군도 속 각각의 섬의 한계를 규정함으로써 형태를 강화하는 방법으로 보아야 한다.
도시 해체의 유토피아적 비전에 대응하거나, 혹은 반대로, 전체적 시스템으로 도시를 줄이는 생각, 혹은 심지어, 주변부 블록 같은 형태를 강화해서 도시를 재단하는 이미지를 복원하면서, Berlin as a Green Archipelago는, 모더니스트와 포스트 모더니스트의 선례와 넘어서고, 현재도 그 도발적인 논리로 인해 완벽하게 진가를 인정하기 어려운 패러다임을 제안했다. 그 논리들은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걸친 웅거스의 제안과 저술 등, 일련의 도시 프로젝트의 발전과정을 좇음으로써 알아볼 수 있다. 특히 사람들이 웅거스의 가장 중요한 도시 디자인 프로젝트, 베를린에 관한 교훈적 연구, 그의 작품과 이론 그리고 OMA 의 “ 메트로폴리탄 건축”에 대한 초기의 정의를 연결 짓는 것 등을 고려할 때, 이런 일련의 결과물은, Berlin as a Green Archipelago에서 하나로 점철된 프로젝트로 보인다. 웅거스와 OMA의 학문적 교류는, 심지어 그것이 충분하게 발전되지 않았음에도, 1970년대 도시에 관한 연구에 있어서 가장 흥미로운 관계 중 하나이다. 이 교류는 주요 프로젝트의 대한 쿨하스와 웅거스가 협업을 통한 것뿐만이 아니라, 도시 프로젝트를 제안하는 제3의 방법을 개발하려 한 그들 상호 간 관심에서 그 기초를 둔다. 두 사람 다 모더니스트 도시의 계획과 어떤 도시 프로젝트에도 불 충분해 보였던 포스트 모더니스트 해체주의의 교착상태를 넘어서려 했다.
이 장의 주안점은 웅거스 프로젝트를 도시의 건축을 수여된 건축적 형태로 정의 하려는 시도로 재구성하려는데 있다. 웅거스는 그의 프로젝트에서, 도시의 내재적인 집단적 범위, 도시의 변증법적 기질, 부분으로 구성이 되는 도시, 서로 다르고 때때로 반대되는 형태들로 구성된 도시, 이 같은 도시의 특성을 재발견함으로서, 그리고 베를린이 가장 극단적이어서 전형적인 예시가 될 수밖에 없었던 1960년에서 70년대 많은 도시에 영향을 주었던 도시 환란 안에서, 도시 속의 도시에 대한 가능성으로 건축적 형태의 한계와 유한성을 서술하고 있다.
웅거스의 건축가로서의 위치는 독일 역사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 중 한때와 일치한다. 이차 세계 대전 후에, 독일은 전쟁 통에 무너진 도시의 재건뿐만 아니라 12년간 나치에 의해 굴복 되었던 나라를 정치적, 문화적, 그리고 윤리적으로 새롭게 건설해야 한다는 고통스런 임무를 떠 안고 있었다. 더군다나 독일이 냉전 시대의 진앙 지였기 때문에 이러한 재건은 더더욱 힘든 상황이었다. 사상적 대칭점에 서 있는 동쪽 서쪽은 사상적 모멘텀으로 가득했고, 이는 독일과 전 유럽에 예시적 도시 프로젝트로 알려지는 일련의 계획들과 설계경기들을 양 지역이 쏟아내게 했다. 가장 대표적이고 가장 선동적인 프로젝트는 두 가지는, 1952년 Hermann Henselmann 에 의해 계획되고 1960년에, 동독의 수도, 동 베를린의 중심으로서 완공된, 기념비적인 가로인 The Stalinalle in the East와, 1957년에 계획되고 1961년에, Alvar Aalto, Walter Gropious, 그리고 Oscar Niemeyer 를 포함한 주요 모던 건축가들이 디자인에 참가한 국제 하우징 프로젝트 전시의 일환으로 완성된 주택 단지 프로젝트인 the Hansa Viertel Interbau in the West 를 들 수 있다. 도시의 변증법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 외에도, 이들 프로젝트의 형태적 사상적 대위는 도시 재건을 위한 새로운 모델을 정의 하는데 있어서 생겨난 교착상태를 분명하게 만들었다. 만약 the Stalinallee가 도시의 메인 이미지로서 가로의 테마를 가지는 기념비적인 강조를 통해 회복되었다면, the Hansa Viertel은 녹지 위에 흩어진 주거 타입의 이미지를 통해 반대의 극단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방법을 넘어서서 웅거스의 도시 프로젝트를 위한 원리의 개요를 그리려는 시도의 동기를 제공한 제3의 길을 찾으려는 노력이 있었다.
이런 원리들은 웅거스가 1960년대에 초에 했던 프로젝트에서 먼저 형성되었다: 퀠른 하우징 프로젝트 Neue STadt (1961-1964), Gologne Grunzug Sud (1962-1965), Berlin Markisches Viertel(1962-1967), Enschede, Holland 학생 기숙사 프로젝트 엔트리 (1964). 이런 프로젝트들에서 웅거스의 접근 방식은 명백하게 논쟁적이었다. 그들의 합리적이고, 기념비적인 형태는 건축의 역할을 건물의 외피를 만드는 것으로 축소시킨 방법인 주어진 빌딩의 단위로 도시 디자인에 적용하려는 포괄적인 방법을 후기 모더니스트들이 활용 것에 대한 비판으로 의도 되었다. 도시 프로젝트에 주어진 전통적인 권한에 대응으로서, 이런 제안을 다루는 주요 원리는, 도시를 포괄적 연장하는 것이 아닌, 도발적인 도시의 생각을 보여주는 그의 내적 형태의 구성을 통해, 무한한 인공물로서, 도시 부분 부분을 명확하게 형성시키는 새로운 주거 단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Cologne Neue Stadt 프로젝트는, 슬라브와 타워가 녹지 위에 널려 있으면서 어떤 알 만한 형태를 만들지 않도록 함으로써, 전형적인 후기 모더니스트 도시 계획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가했다. 웅거스의 단지는 다른 높이를 가졌지만 하나의 건축적 통합체를 구성하는 일련의 주거 타워 군들로 여겨졌다. 각 아파트의 대표 평면은 주요 활동 공간이 명확한 방의 평면에 둘러싸인 식이었다. 이런 구성법은 각각 타워의 형태를 만들게 해서, 이런 수직적 볼륨이 그룹 짓고 이를 통해 전체 단지의 공간적 형태적 구성을 보여주는 것이 가능하도록 했다. 이런 창의적 구성으로, 웅거스는 거실 공간을 아파트의 다른 방 보다 높게 고저 차를 주어서, 주택 블록의 외부의 형태를 볼륨 간의 기념비적 구성으로 만들어서, 이런 신기한 형태가 빛과 그림자의 움직임을 암시하도록 하는 동시에, 내부공간을 복도를 없는 일종의 아트리움 공간으로 만들었다. 웅거스는 그의 Neue Stadt 프로젝트에 대해 정의하길, “양각과 음각”의 도시의 원형이라고 했다. 즉, 채워지고 비워진 공간의 구성을 경험하는 것이 건축적 모티브가 되는 도시이다.
이런 해결책은 도시의 특수한 현상 건축적 단지 안에서 협업을 하는 첫 번째 시도였다. 그는 조금 덜 성공적이었지만 Markishes Viertel Complex in Berlin 프로젝트에, 이형의 열린 중정에 시퀀스를 형성하도록 주거 타워를 그룹 하는 비슷한 방법을 시도했다. Neue Stadt 때처럼, 그는 아파트 타워에서 하나 두 개의 방의 위치를 바꿈으로 기존의 아파트의 분포방식을 바꾸려고 시도했다. 이런 과정은 각각의 건축적 부분의 심플함과 전체적 구성에 의해 만들어진 공간의 복잡함 사이에서 형태적 긴장감을 만들었다. 이런 긴장감은 전후 도시 정착지의 공간적 단조로움에 대한 내제적인 비판으로 해석된다. Neue Stadt 와 Markisches Viertel 모두에서, 웅거스는 기존의 주택 단지에 빌딩 테크놀로지와 유형적 기준을 받아드렸지만, 그는 건물이 들어간 주변 공간 안에서 기념비적인 형태의 가능성을 회복하기 위해 단지의 형태적 구성을 바꿨다.
이러한 전후 도시에 대한 비판은 웅거스의 프로젝트, 네덜란드 the Enschede student housing competition에서 분명해진다. 그는 이 단지를, 기본적인 지오메트리인 삼각형 사각형 원형에서 시작하는 형태적 구성의 카탈로그로서 디자인했다. 기존의 계획과 비슷하게, 디자인 방법은 , 제한된 형태적 어휘를 이용함으로써 도시를 연상시키는 복잡한 공간을 양산했다. 사이트에 대한 반응으로서, 지방도시의 주변에서, 웅거스는 녹지 위에 흩어져 있는 파빌리온 형태의 캠퍼스를 만드는 전형적인 주거형태의 이론 거부하고, Hadrian’s Vill 의 공간 구성을 떠올리게 하지만 정작 그 형태는 Jean-Nicolas-Louis Durand 의 소박한 건축적 문법을 연상시키는 자생적인 도시의 형태로서 새로운 캠퍼스를 첨가하는 디자인을 제안했다.
공간의 복잡한 시퀀스를 구성하고 표현하기 위한 단순한 건축 볼륨의 표현은, 무엇이 웅거스의 원형적 도시 디자인 프로젝트(cologne Grunzug Sud)로 고려되는지에 보여주는 급진적 형태를 가정한다. Neue Stadt, markisches Viertel, 그리고 Enschede 에서는 기이한 볼륨 구성으로 현대 도시 계획의 반복적인 공간 패턴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면, 1966년Team Ten의 미팅에서 발표된 Grunzug Sud 의 거주 지역 제안은 후기 모더니스트의 가장 상징적인 대안인 바로 메가 스트럭춰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드릴 수 있다.
프로젝트 당시에, Grunzug Sud 지역은 이렇다 할 도시 나 건축물이 없는 교외 지역이었다. 이 지역을 재건하려 했던 애초의 이유는 새로 지어진 고속도로를 Bonn에 가는 도시순환도로와 연결하려 한 것이었다. Neue Stadt 나 markisches Viertel 때 처럼 새롭게 단지를 디자인 하려 한 것이 아니라, 웅거스는 프로젝트를 어느 정도 일반적인 형태를 체계적 형태적 으로 다시 읽고 이를 기초로 한 사이트의 점진적 변화로 여겼다. 웅거스는 중심가로의 방향을 도시의 형태 분석을 위한 섹션으로 삼았다. 이러한 분석에 따르면, 그는 도시의 현존하는, 이질적 공간과 빌딩의 조합을 확실하게 정의된 선적인 구성으로, 각기 다른 빌딩 형태로 형성된 각기 다른 건축적 사건으로 진화시켰다.
그러나 이 접근은 컨텍스트의 모방에 기대지 않았지만, 추상과 소박한 건축적 형태의 언어를 받아드리고 있다. 웅거스가 기존의 도시를 통해 추론해 낸 것은 토착적인 것이거나 도상의 요소들이 아니라 오히려 열리고 닫힌 공간의 시퀀스와 벽이 만들어내는 리듬감, 방화벽의 볼륨적인 효과, 연속적 오프닝 패턴을 가진 하우징 파사드의 연속성 같은 것들이 만들어내는 가장 건축적인 추상이었다. 이러한 형태적 요소들은 사이트의 내적인 도시 텍스트가 명확하고 가독성있게 되었다는 점을 통해서 새로운 빌딩들의 소박한 구성으로 변했다. 예를 들어, 흩어진 채로 존재하는 저층 주거의 선적인 형태가 새로운 주거지의 다양한 리듬의 조합으로 재구성된다.
여섯개의 패널이 일렬로 프레임 되었던Grunzug Sud 플랜이 그려진 프로젝트 프레전테이션 패널에 이 이 전략이 표현돼있었다. 각 부분은 새로운 계획의 렌더링이 아닌 현 상황을 보여주는 사진으로 더 표현돼있었다. 그 사진들은 거리풍경, 빌딩들이 끊긴 모습, 방화벽, 골목길, 넓은 공터 같은 일상의 거리풍경과 담았고 프로젝트의 주요 건축적 형태로서 도시의 공간적 불연속성을 표현했다. 잔존하는 것과 새로운 것 간의 형태적 긴장감은 프로젝트의 시작점으로서 현재의 상황을 알아채는 것 이상을 제안한다, 그것은 도시 형태의 구성요소적 형태의 긴장감과, 단순화 할 수 없는 형태와 각 부분의 공간적 자율성 의 변증법적 관계 그리고 다른 부분을 도시로서 하나의 일관적인 구조로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Grunzug Sud에서, 이런 변증법적 긴장감은 의도적으로 급진화 되었다.
형태적 일관성은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는 하나의 구조 아래로 전체의 도시를 뒤덮는 메가스트럭춰가 주지만, Grunzug Sud 의 선형 구성은 도시를 거대하지만 제한된 도시구조물의 변증법적 구성으로 예상 될 뿐만 아니라, 이런 도시구조물의 내적 구조를 분리된 독립적인 부분으로 여기게 한다. 이러한 내적인 구조는 도시의 형태를 형성하고, 제한된 범위 안에서, 도시의 표현이 되는 분절을 반영 한다. 프로젝트의 리얼리즘이 보여주듯이, 웅거스의 도시 안의 도시 개념은 도시의 분열에 반대하는 목가적인 도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건축적 구조물 자체 안에서 도시의 형태를 쪼개내려는 시도였다. Grunzug Sud는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의 Berlin 연구의 단초가 되는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1963년과 1969년 사이에 웅거스는 베를린 공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가 학교를 들어오기 전에는, 일반적 학과 과제들은 “ 예술가를 위한 집” 이나 “ 호수 옆에 집” 같이 이상적 프로그램들에 기초를 두고 있었고, 또한 도시 문제에 대해서 회피하고 있었다. 건축과 도시디자인의 명확한 분열에 맞서기 위해서, 웅거스는 체계적인 도시 해설을 기본으로 한 디자인 실험을 제안했고, 서 베를린을 건축적 추정치를 실험하는 장으로 만들 것을 제안했다. 도시의 편협성, 전후 분열, 불균형한 도시개발, 그리고 베를린 월 같은 가장 주요한 조건들은 지도로 만들어진 후 급진적 건축적 개발을 위한 가능성의 장으로 변했다.
이런 접근은 Hans Scharoun이 학교의 문화에 끼친 영향에 반대하는 논쟁적 위치에 있었다. 1950년대에 Scharoun 은The International Berlin Hauptstadt competition (1958) 로 점철되는 베를린 위한 도시 계획 아이디에 공을 드리고 있었다. 샤로운은 전체 도시를 효율적인 도로망으로 제공되는 거대한 녹지공원으로 바꾸는 제안을 했다. 프로젝트, 샤로운이 나찌 사상의 시초로 생각한 프러시안 베를린의 유산이나, Stalinalle 와 같이 동 베를린의 개발에서 보여지는 기념비성에 대하여 반대했다. 이러한 유산에 반대하여 일을 하면서, 샤로운은 베를린의 파괴를 베를린의 유적이 그 안에서 유토피아적인 목가의 풍경을 만든다는 비 도시화 플랜인 고대유물의 가능성으로 계획했다.
이러한 도시에 대한 이해의 방법에 대항해서 웅거스는 베를린에 대해서 무한히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재건의 불확실성 때문에 이 최소화 할 수 없는 확장적 부분으로 이루어진 분단의 도시보고, 베를린 자체를 가장 논쟁적인 형태로 보았다. 웅거스는 슁켈의 일명 Havellandschaft( Havel 강 주변의 녹지지역) 를 위한 모델에서 이러한 상황에 맞는 원형을 발견했다. 이 프로젝트는 슁켈 본인과 그의 조력자인 Peter Joseph Lenne가 19세기 전반에 걸쳐서 Hohenzollern을 위한 왕실의 편의시설로 발전시킨 파빌리온, 성, 그리고 정원으로 이루어진 단지다. Havel 강 주변에 일종의 Hadrian’s Villa를 디자인하기 위해서 왕실에서 발주를 받아서, 슁켈은 전체적인 도형적 구성안에 포함되지 않고 강 전역을 포함한 건축적 이벤트로 가득 찬 녹지공간을 제안했다. 그의 제안은 건축물들이 자연적 조건 위로 겹쳐지는 군도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웅거스의 후기 접근방법의 전형은 Havellandschaft 사이트 일부에서 볼 수 있다. 그것은 웅거스가 그와 그의 학생을 위해 만든 베를린의 본질적 자연에 관한 실로 선동적인 전형으로 사용할 수 있는 프로젝트로, 1824년과 1837 사이에 디자인된 파빌리온 정원인 Klein Glienicke 를 위한 웅거스의 디자인이다. 이 단지에서 건축적 오브젝트인, 카지노, 빌라, 그리고 파빌리온들은 어떠한 축이 만들어내는 가이드 없이 녹지 위에 자유롭게 놓여 있다: 오히려 그것들은 또다시 공원에 흩어진 작은 것들과 배로 늘어나는 예상치 못한 관계를 만들어낸다. Klein Gliencke를 특징 짓는 것은 공간들 사이의 급진적 풍부함과, Havel 강의 덩굴 시렁 같은, 근원적 형태로 만들어진 건축의 요소적 단순함 사이의 대립으로 들 수 있다. 게다가 이러한 형태는 단지 공원에 흩어진 조각 같은 것 만이 아니다. 그것들의 다양한 구성, 재료, 그리고 프로그램 때문에, 그것들은 모두 형태적 사건으로서 군도를 만들어내는, 형태적 문법에 기초를 둔다. 슁켈도 같은 접근방법을 베를린 개발에 사용했다. 나폴레옹 전쟁의 도시 환란 후에 조각나 버린 도시의 조직은 전체 플랜을 위한 시도 와중에도 바로잡히지 않았고, 오히려 도시 내의 녹지공간으로 고려되었다. 도시 조직의 불 완전성을 새로운 공간감의 가능성으로 남기면서, 슁켈은 그의 공공작업을 자율적 도시 안에서 자유롭게 정리된 블록들의 점 적인 구성으로 발전시켰다. 웅거스는 이러한 베를린의 개념을 낭만적 생각을 가볍게 보여준다기보다는 오히려 전쟁의 영향을 드러내려는 방법으로 받아드렸다. 이러한 문맥에서, Havel 강가와 베를린에서의 슁켈의 열린 구성은 현대 베를린의 분열적 경관을 세련화 시키는데 사용될 수 있었다.
이러한 도시에 대한 이해의 방법에 대항해서 웅거스는 베를린에 대해서 무한히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재건의 불확실성 때문에 이 최소화 할 수 없는 확장적 부분으로 이루어진 분단의 도시보고, 베를린 자체를 가장 논쟁적인 형태로 보았다. 웅거스는 슁켈의 일명 Havellandschaft( Havel 강 주변의 녹지지역) 를 위한 모델에서 이러한 상황에 맞는 원형을 발견했다. 이 프로젝트는 슁켈 본인과 그의 조력자인 Peter Joseph Lenne가 19세기 전반에 걸쳐서 Hohenzollern을 위한 왕실의 편의시설로 발전시킨 파빌리온, 성, 그리고 정원으로 이루어진 단지다. Havel 강 주변에 일종의 Hadrian’s Villa를 디자인하기 위해서 왕실에서 발주를 받아서, 슁켈은 전체적인 도형적 구성안에 포함되지 않고 강 전역을 포함한 건축적 이벤트로 가득 찬 녹지공간을 제안했다. 그의 제안은 건축물들이 자연적 조건 위로 겹쳐지는 군도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웅거스의 후기 접근방법의 전형은 Havellandschaft 사이트 일부에서 볼 수 있다. 그것은 웅거스가 그와 그의 학생을 위해 만든 베를린의 본질적 자연에 관한 실로 선동적인 전형으로 사용할 수 있는 프로젝트로, 1824년과 1837 사이에 디자인된 파빌리온 정원인 Klein Glienicke 를 위한 웅거스의 디자인이다. 이 단지에서 건축적 오브젝트인, 카지노, 빌라, 그리고 파빌리온들은 어떠한 축이 만들어내는 가이드 없이 녹지 위에 자유롭게 놓여 있다: 오히려 그것들은 또다시 공원에 흩어진 작은 것들과 배로 늘어나는 예상치 못한 관계를 만들어낸다. Klein Gliencke를 특징 짓는 것은 공간들 사이의 급진적 풍부함과, Havel 강의 덩굴 시렁 같은, 근원적 형태로 만들어진 건축의 요소적 단순함 사이의 대립으로 들 수 있다. 게다가 이러한 형태는 단지 공원에 흩어진 조각 같은 것 만이 아니다. 그것들의 다양한 구성, 재료, 그리고 프로그램 때문에, 그것들은 모두 형태적 사건으로서 군도를 만들어내는, 형태적 문법에 기초를 둔다. 슁켈도 같은 접근방법을 베를린 개발에 사용했다. 나폴레옹 전쟁의 도시 환란 후에 조각나 버린 도시의 조직은 전체 플랜을 위한 시도 와중에도 바로잡히지 않았고, 오히려 도시 내의 녹지공간으로 고려되었다. 도시 조직의 불 완전성을 새로운 공간감의 가능성으로 남기면서, 슁켈은 그의 공공작업을 자율적 도시 안에서 자유롭게 정리된 블록들의 점 적인 구성으로 발전시켰다. 웅거스는 이러한 베를린의 개념을 낭만적 생각을 가볍게 보여준다기보다는 오히려 전쟁의 영향을 드러내려는 방법으로 받아드렸다. 이러한 문맥에서, Havel 강가와 베를린에서의 슁켈의 열린 구성은 현대 베를린의 분열적 경관을 세련화 시키는데 사용될 수 있었다.
도시 읽기를 따르고 웅거스가 Gunzug Sud 에 사용한 방법을 활용하면서, 그의 학생들은, 그들이 고속도로, 공원, 운하, 스프리강, U-Bahn 네트워크 같은 도시의 인프라스트럭쳐 대한 체계적 연구를 수행한 장소인 베를린에 대하여 체계적 형태적 그리고 지형적인 측량법을 만들어냈다. 이런 베를린의 레이어는 도시의 정보로서만이 아니라, 도시의 어떠한 자연적 회복도 가로막고 도시를 부분으로 나누는 분열적 형태로 보는 그들의 건축적 결론에 관한 것으로 보였다. 스프리 강이 도시를 가르고 있는 상황 안에서 그 예측 불가능한 방법은, 예를 들어, 분열적인 사이트를 새로운 선형적 도시를 바꾸는 정착지 개발의 논리로 여겨졌다. 도시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대신에, 이런 방법을 제안하는 프로젝트는 프로젝트 자체의 테마적인 형태로 이용하려 했다. 웅거스의 코스 책자에 나온 프로젝트를 보면서, 우리는 도시의 가장 논쟁적 지점에서의 개발과 프로젝트의 주제를 문맥화하려는 의지와 제한적 형태의 소박한 레퍼토리를 가진 조건에 맞서려는 의지를 볼 수 있다. Wohnen am Park (공원 안의 도시)에 소개된 한 프로젝트에서, 4개의 부분적으로 파괴된 도시 블록들이 3개의 다른 주거구조 (혼합 사용 슬라브, 저층 T 형태 빌딩, 그리고, 혼합 코트 야드 빌딩) 위로 중첩이 되고, 들어 올려진 공공 가로에 의해 만들어진 선형구성에 함께 놓인다. 들어 올려진 공공가로는 4개의 블록을 하나의 콤플렉스로 묶으면서, 세계 속에 자유롭게 서 있는 빌딩들이 둘레를 완벽하게 채워 넣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면서, 그러함으로 도시 안의 폐허의 상태를 유지 하면서, 블록을 채워 넣는다. 이 모든 프로젝트의 공통의 기초는 점진적 개발이다: 전체 플랜에 따른 개발을 하는 대신, 베를린을 위한 프로젝트는 거대 도시 삶의 급진적 형태의 폭발로서 도시의 개발을 상상시키는 급진적 도시 건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어떤 경우에 학생들은 단순하게 일상의 도시를 지도화해서 그것들은 초기화 상태가 아닌 명쾌한 프로젝트로 이상화했다. 예를 들어서, 전쟁의 파괴인해 드러나게 된 많은 방화벽이 체계적으로 사진이 찍히고 엮여서 체계적으로 베를린 장벽을 패러디 한, 눈먼 벽돌 벽의 시퀀스가 되었다.
이런 방법의 가장 훌륭한 제현은 베를린에서가 아닌 런던에서 였다. 1960년대 후반에, AA 스쿨에서 교수법에 관한 아키그램의 절대적 영향력에 반대하여, AA스쿨의 교수였던, Eliza Zenghelis 는 그 중 에는 Rem Koolhaas 도 속한 스튜디오 그룹의 학생들에게 웅거스의 작업을 소개했다. 2004년 웅거스와의 대화에서 렘쿨하스는 Grunzug Sud 가 처음으로 접한 웅거스의 작업으로 말하고 있다.
1971년에, 렘쿨하스는 베를린 장벽에 가보기로 한다. 그리고 3학년 프로젝트를 위한 건축 작업으로서 그것을 기록했다. 장벽에 관한 쿨하스의 정의는 Grunzug Sud 에서 보여지는 웅거스의 구성적 방식과 매우 흡사하다. 쿨하스는 자신의 발견에 대하여, 장벽의 선형적 구조는 도시를 뚫고 지나가는 하나의 선으로서만이 아니라 닫혀져 있는 상태의 도시에 가해진 정치적 의도가 만들어내는 건축적 사건들간의 선형적 시퀀스라고 논했다. 이러한 정의에서 쿨하스는, 도시의 형태에서 진짜로 만들어진, 이상적 선의 형태 가 아니라 일반적 형태의 집이나 벽, 펜스, 그리고 공간을 나누는 모든 건축적 요소로서 나타내어지는, 닫힘의 정치적 특성을 강조하는 방법으로서 장벽이 가진 정치적 의미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그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쿨하스에게 어떻게 한때 실제에 설치된 건축물이 그것의 순수성과 형태적 통일성을 잃고 전혀 다른 상황들의 시퀀스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보통의” 건축으로서의 베를린 장벽이었다. 웅거스의 Grunzug Sud 프로젝트와 웅거스와 그의 학생들이 그들의 프로젝트를 적용했던 베를린의 실제 했던 주요한 상황에 대한 “반동적인” 합리화를 따라가면서도, 쿨하스는 베를린 장벽을 어떻게 건축이 통일성 보다 단절성을 일으키는 지를 표현하는 것으로 승격시켰다. 이것은 쿨하스가 그의 논거를 만들기 위해서 사용한 장벽의 사진들에 있는 증거다. 이런 사진 속에는, 장벽의 선적 형태는, Grunzug Sud 의 긴 형태처럼, 열린 공간, 빌딩들의 열주, 다른 재료로 만들어진 펜스, 등등의 공간적 사건이 되었다. 웅거스의 학생들의 프로젝트에서처럼, 장벽의 테마는 지속적 형태나 일관적 시퀀스라고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없지만, 대신에 도시의 형태를 급진적 단절성으로 보여주는 철저히 다른 일련의 상황을 통해서 표현이 된다.
누군가는 도시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 웅거스의 Grunzug Sud 프로젝트에 영향을 받아서 접근한 방법 – 쿨하스의 저서이자 주요한 도시 현상을 도시 프로젝트에 기초로 사용하는 Delirious New York 의 개념적 기초가 되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웅거스와 쿨하스 그리고 젠켈리스(Zenghelis)의 초기 작업 사이의 연관성을 따르면서, 우리는 웅거스 도시 속의 도시 개념이 쿨하스 젠헬리스 의 “엑소더스” 나 “건축의 자발적인 포로”(1972) 작업으로 본질적으로 발전했음을 볼 수 있다. 부제목이 이야기 하듯이, 이런 프로젝트의 주제는 수감자이다.쿨하스와 젠켈릴스는 “자발적 포로”가 스스로의 고립을 선택한 악화된 공산사회의 주민 같은, 가장 극단적 상황 속 거대도시의 주거 민을 의미하는 은유로 의도했다. 자발적 포로는 단일화와 통합 보다는 분할과 배제의 방법을 통해서 만들어진 도시의 현실감을 의도적으로 받아드리는 주제를 은유 했다. 이에 부응하여, “엑소더스”는 런던을 뚫고 지나가는 두개의 평행하는 벽과 그것은 8개의 섹터로 나누는 것으로 구성된다. Grunzug Sud 의 주거 단지와 베를린 장벽 모두서로 다른 도시의 조건을 초월하고 급진화 시키면서, 실체 하는 도시를 분절시키면서 나아간다. 엑소더스는, 슈퍼스튜디오의 Continous Monument처럼 단순한 선이 거나 Ivan Leonidov의 Magnitogorsk 를 위한 전략에서처럼 동형의 모듈의 반복 같은 게 아니다. (물론 두 프로젝트가 Exodus에 영감을 준 것은 맞다.); 그것은 철저히 도시의 서로 다른 부분에 의해 만들어진 선형적 구성이다. 이러한 각각의 부분들은 도시의 삶의 사회적 건축적 풍자의 형태 안에서 도시 부분들 (교외, 병원, 뮤지엄, 공원 )의 형태학적 그리고 프로그램적인 과장으로 의도 되었다. 엑소더스는 의도적으로 분열, 공격성 증오 등의 상황을 도시의 논리적 자양분으로 여겼다. 그래서 엑소더스는 웅거스의 대비되는 부분으로 만들어진 도시 베를린의 해석에서부터 좀더 명확한 정치적 시나리오로 진화했다.
최근의 강연에서, 젠켈리스는 엑소더스의 다른 부분은 두 가지로 즉 선형적 구조 안에 놓여있는, 그리고 독립적인 거대도시 공동체를 위한 자치적인 도시 섬으로서 이해 된다고 주장했다. 프로젝트로서 엑소더스는 – 쿨하스를 맞닥뜨린 후의 웅거스가 큰 감명과 관심을 보여주었다 – 웅거스의 Grunzug Sud 와 베를린에 관한 연구, 그린 아키펠라고 처럼 정치적으로 확실한 프로젝트 에 소개되었던 건축적 원리를 연결하는 어떤 연결점으로 여겨질 수 있다. 엑소더스는 웅거스의 작업에서 이미 나타난 주제, 즉 거대도시를 도시의 집합적 영역을 상정하는 건축적 형태로 쪼개내는 힘의 원리를 더욱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웅거스는 이미1969년 미국으로 이주를 (일 년 동안, 1968-1969, 그는 베를린과 코넬에서 동시에 교수직을 수행했다.) 앞두고 시작한 연구 주제에서 좀 더 공공연하게 정치적인 접근을 시작했다. 업스테이트 뉴욕에서 살면서, 그는 미국의 공공의 삶에 관한 역사적 예시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고, 이러한 주제에 관해서 그의 아내, Liselotte, 와 함께 1970년대 초반에 집필하기 시작했다. 웅거스가 범위가 정해진 형태의 범주로서 그의 도시에 대한 생각이 가능한 사회적 정치적 연결고리를 위해 이러한 커뮤니티에 대한 연구 시작했음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일반적인 사회의 조직의 변화에는 상관없는 실험적인 사회 공동체에 대한 전통적인 마르크시스트의 비판에 맞서면서, 웅거스는 이러한 미국의 공동체가 믿을만한 패러다임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서, 그의 종교적 공동체에 대한 연구를 요약하는 에세이 에서, 웅거스는 어떻게 급진적인 사회적 삶이 사회전체에 전체주의화 하는 유토피아로서만이 아니라, 자족적인 공간이자 기존의 도시 중심에서 독립해있는 마을을 세우는, 분리주의자 그룹에 의해 자발적으로 포용되는 공동체 주의적 원리로서 총아로서 시행이 되는지를 고려했다. 웅거스에 따르면, 이런 “ 완벽한 유토피아”는 거의 가능할 수도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공간과 주거지의 숫자에 있어서의 부족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쉐이커 같은 종교적인 공동체들은 개인적 자산을 가지지 않는 공동체 삶의 원리에 의해 특징이 지워 진다. 모든 시설들은 공동체가 공유하고 공동체 삶에 의해 구성되는 많은 공용공간과 소유한 농지에 의해 모양이 만들어져서 도시와는 분명한 대비를 만들어내는 형태를 가진 정착지가 되었다. 웅거스는 급진적 공동체들은 오직 제한된 주거지역 안에서 만 가능하다는 점을 관찰했다. 인구의 증가는 각각의 정착지의 증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정착지의 수를 높이는 증식을 발생시켰다. 각각의 정착지의 한계는 자치 적운영의 가능성에 따라서 커뮤니티 자체에 의해 스스로 부과되었다. 그래서 정착지의 형태는 외적인 도시 질서와는 무관하다.
이런 마을들은 경제적 분리나 다른 사회적 운영의 범주의 채화가 아니라, 공동체적 삶을 따름을 통해 나머지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려는 공동체의 개념적 의지이다. 예시들은 웅거스가 제한된 부분의 군도로서의 도시에 대한 생각을 발전 시키는 것이 모더니스트 건축가들의 전체적 프로젝트를 알아채게 하려 하는 것보다 좀 더 실현 가능성이 있다고 믿도록 이끌었다. 게다가 군도에 대한 개념은 주거민의 그룹이 공동체적인 삶을 위한 공간을 주장할 수 있게 한 건축적인 인공물을 통해 그들 자신의 독립성을 유지 할 수 있는 도시 형태에 대한 새로운 정치적 개념을 열었다.
비슷한 관찰의 결과가 슈퍼 블록에 대한 웅거스의 연구에서 나타났다. 그는 특히 비엔나 슈퍼 블록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것은1919년과 1934년 사이 오스트리아 수도의 사회 민주 정부의 가장 유명한 건축 프로젝트였다. 소위 적 비엔나는 무엇이 도시 안에 도시를 의미하는 지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적 비엔나는 베를린 그린 아키펠라고의 가장 중요한 레퍼런스가 된다. 몇 년간을 거치면서, 어려운 경제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비엔나 정부는 노동자를 위한 주거시설 14,000 호를 도시 안에 위치한 블록의 형태로 건설하였다. 코스 설명서에서 웅거스는 비엔나 슈퍼 블록의 지도를 편찬했다. 지도는 블록의 위치가 전체 도시 계획에 따라 배치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개발의 지점으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지방 자치정부는, 도시의 확장으로서 도시 주변부에 주거지를 계획한다는 초기 개념과 대비되게도, 이 새로운 주거 계획을 도시 안에 위치시키자고 제안했다. 그의 비엔나 슈퍼 블록 연구에 대한 소개의 글에서, 웅거스는 이러한 형태가 어떻게 가든 도시와 Siedlung의 정착지 논리의 대안이 되는가를 강조한다. 이러한 모델에서, 노동계층은 산업도시의 주변부의 조각나고 가장자리로 몰린 지역 속 나머지 사회로부터 이방인 취급을 받는다. 비엔나의 지방 정부는 마냥 새로운 주택의 총량을 늘리는 대신에 매우 정확한 형태, 즉 그것의 공간적 프로그램적 원리가 수도원의 회랑의 형태를 연상시키는 모뉴멘탈 한 내부 정원의 형태를 기초를 하는Hof 나 슈퍼 블록의 형태를 택했다. 웅거스는 비엔나 정부의 주요 목표가 단지 주거지 부족 문제를 해결한다기 보다는 노동 계층의 의식과 주거지 내의 공산사회주의 정신을 고양시키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음을 명시했다. 이러한 이유로, 비엔나 슈퍼 블록은 도시를 확장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자급자족적 도시 섬으로서 주변과 눈에 띄는 대비를 이루면서 도시 안에 위치한다. 웅거스가 강조 했듯이, 슈퍼블록의 확실한 건축적 정체성과 집단적 공간의 너그러움은 거대도시의 중산층의 개인화와 반대급부로 서 있다. 다른 모더니스트 시티 프로젝트와는 다르게도, 스타일, 빌딩 구성의 참신성, 아파트 레이아웃에 있어서 비엔나 슈퍼 블록은 혁신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의 혁신성은 급진적이고 눈에 띄는 건축적 형태 안에서의 공동 시설들의 급진적인 재 분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각각의 슈퍼 블록은 병원, 도서관, 세탁소, 체육관, 식당 그리고 유치원 같은 기본적인 공동 서비스 시설들을 구비하고 있다. 이러한 시설들은 슈퍼 블록에 자급 자족성, 그리고 집합 공간의 사용을 통해 단지의 정치적 이미지를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성격을 제공하기 위해 디자인 되었다. 그 결과는 기본적 도시 계획에서 벗어나는 슈퍼 블록의 자율성이고 이것들이 공동체적인 삶을 위한 장소들의 군도로 이어진다. 코트 야드의 그 형태적 그리고 형상학적인 테마는 이런 공동체적 삶의 정체성을 강화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이다.
이러한 측면은 또한 슈퍼 블록에 대한 웅거스의 재평가에서도 결정적이다. 그가 강조하기를 모더니스트 계획이 시각적인 삶의 수준으로 건축적 공간을 개선하는 데 집중을 한다면, 슈퍼 블록의 건축은 대신에, 노동자 계층의 사회적 운영을 위한 공간을 제공하는 단순한 행위로부터 거주자로서 하여금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이 느껴지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자존심을 부여하는 기념비적이고 선 굵은 제스처로써 사회적 주거를 격상시키고, 건축에 의식적인 정체성을 부여하면서, 공간의 테마에 맞춘 성과에 집중했다. 웅거스가 미국의 공동체 그리고, 도시를 거대한 형태의 구성으로 이해하는 것과 발맞추어서, 빌딩 타입으로서 비엔나 슈퍼블록의 아이디어와 함께 빠져들었던 것은 Schinkel의 베를린에서 나타난 점적 인 간섭과 같은 종류의 디자인 개념으로, 사회적 정치적 범위를 더한 것이었다.
1968년에 로우는 (Rowe) 처음으로 웅거스를 코넬의 교수로 초대했다. 더군다나 이 시기에 웅거스는 독일에서 학문적 전문적 위치가 반- 건축의 정치적 저항으로 인해 점점 더 논쟁적이 되었기 때문에, 웅거스는 좀 더 환대 받을 수 있는 환경을 꿈꾸면서 코넬대학으로 옮겨왔다. 당시에 로우는 그의 작업을 심층적인 건축읽기에서, 후에 콜라주 시티로 (1973년에 완성했지만 1978년에 출판이 된다.) 나타나는 전문적인 도시 디자인 이론을 만들기로 바꿔 나가고 있었다. 로우는 다른 역사적 건축적 예시들의 섬세한 브리콜라주를 사용하여 모더니스트 계획의 유토피아적 무의 상태 방법 (Tabula rasa)에 대응하려 했다. 그가 주장한 그러한 접근 방법은 포괄적인 다원주의의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는 자유 민주주의적 정권에 맞는 도시로 이끈다. 로우에게 있어서, 그런 이상적 도시를 위한 형태적 패러다임은 이미 로마를 묘사한 Giovanni Batista Nolli의 그 유명한 지형학 연구에 의해 실현되었다. 자유주의 정치의 이상적인 렌즈를 통해서, 로우는 놀리의 로마를,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도시 조직의 그라운드 안에서 공존하는 고상한 건축적 형태들이, 복잡한 콜라주를 피하면서도, 이질적인 건축적 형태의 점진적인 조정에 의해 만들어지는 도시, 즉 “콜라주 시티”로 전환시켰다. 이러한 움직임을 통해서, 로우는 복잡성을 하나의 단순하고 일시적인 레이어로 집어 놓음으로서 그것의 분쟁적 유산을 억제 하면서 로마의 시간에 기반한 진화를 현재의 시점으로 압축해 놓았다. 분쟁에 대한 가능성은, 도시의 불규칙적 조직, 로우의 언어로서 다른 형태간의 포쉐로 역할을 하는, 지형적 그라운드의 비공식적 규격에 담긴 순전히 형태학적인 다양성으로 축소된다.
로우는 웅거스의 건축 그리고 도시 디자인에 대한 아이디어가 로우가 생각하는 브리 콜라주의 접근과 비슷한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웅거스를 코넬로 초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확히는 웅거스가 후에 로우의 “콜라주 시티”에 대응하는 자신의 저서인 “변증법적 도시”같은, 그의 연구의 이론적 전재를 좀더 급진화시키도록 도움을 주게 되는, 웅거스와 로우의 작업간의 근본적인 다름에 대한 웅거스의 인식이 었다.
로우는 웅거스의 건축 그리고 도시 디자인에 대한 아이디어가 로우가 생각하는 브리 콜라주의 접근과 비슷한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웅거스를 코넬로 초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확히는 웅거스가 후에 로우의 “콜라주 시티”에 대응하는 자신의 저서인 “변증법적 도시”같은, 그의 연구의 이론적 전제를 좀더 급진화시키도록 도움을 주게 되는, 웅거스와 로우의 작업간의 근본적인 다름에 대한 웅거스의 인식이었다. 콜라주 시티에 담긴 로우의 중점적인 개념은 도시 공간을 건설하기 위한 “세트 피스”를 제공하는 것으로서 건축을 이해할 것을 중심으로 삼는다. 세트 피스 는 어떠한 역사적 정치적 지형학적 맥락에서 자유롭게 사용되는 상대주의적인 장치로 축소될 수 있는 건축적 형태다. 로우가 인식한 유일한 맥락은, 확연히 다른 건축적 형상들을 무난한 구성으로 합쳐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의 형태학의 콜라주였다. 그에 따르면, 어떠한 건축적 도형이라도 그것 자체가 형태학적 자료로서 필요성 있게 남아 있고 형태 자체로 확실 하다면, 복수의 용도를 유지할 수 있다. 로우는 도형으로서 그것의 설득력 있음은 단지 건축가의 개인적인 형태적 감각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함축에 의한, 구성의 범주는 주관적이고, 웅거스가 대비적인 부분의 도시에 대한 생각의 중심으로 두었던, 좀더 넓은 문화적 정치적 맥락에서 벗어나 있다. 로우의 도시에 대한 생각에 있어서, 다름은 그저 형태학적 연습은 증가하는 다름의 축적으로 축소된다. 그것은 정확히는 웅거스가 그 만의 방법으로 발전시킨 도시 디자인의 아이디어에 반대한다. 웅거스의 축적의 도시의 이미지에 대한 배격, 자유 시장 정치의 확실한 결과는1970년대, 웅거스의 미국 시기 그의 가장 중요한 두 개의 프로젝트에 나타나는 증거가 되었다. 그것은 서베를린의 두 지역을 위한 도시 디자인 제안이었던 Tiergarten Viertel 과 Lichterfelde 이다.
로우는 웅거스의 건축 그리고 도시 디자인에 대한 아이디어가 로우가 생각하는 브리 콜라주의 접근과 비슷한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웅거스를 코넬로 초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확히는 웅거스가 후에 로우의 “콜라주 시티”에 대응하는 자신의 저서인 “변증법적 도시”같은, 그의 연구의 이론적 전제를 좀더 급진화시키도록 도움을 주게 되는, 웅거스와 로우의 작업간의 근본적인 다름에 대한 웅거스의 인식이었다. 콜라주 시티에 담긴 로우의 중점적인 개념은 도시 공간을 건설하기 위한 “세트 피스”를 제공하는 것으로서 건축을 이해할 것을 중심으로 삼는다. 세트 피스 는 어떠한 역사적 정치적 지형학적 맥락에서 자유롭게 사용되는 상대주의적인 장치로 축소될 수 있는 건축적 형태다. 로우가 인식한 유일한 맥락은, 확연히 다른 건축적 형상들을 무난한 구성으로 합쳐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의 형태학의 콜라주였다. 그에 따르면, 어떠한 건축적 도형이라도 그것 자체가 형태학적 자료로서 필요성 있게 남아 있고 형태 자체로 확실 하다면, 복수의 용도를 유지할 수 있다. 로우는 도형으로서 그것의 설득력 있음은 단지 건축가의 개인적인 형태적 감각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함축에 의한, 구성의 범주는 주관적이고, 웅거스가 대비적인 부분의 도시에 대한 생각의 중심으로 두었던, 좀더 넓은 문화적 정치적 맥락에서 벗어나 있다. 로우의 도시에 대한 생각에 있어서, 다름은 그저 형태학적 연습은 증가하는 다름의 축적으로 축소된다. 그것은 정확히는 웅거스가 그 만의 방법으로 발전시킨 도시 디자인의 아이디어에 반대한다. 웅거스의 축적의 도시의 이미지에 대한 배격, 자유 시장 정치의 확실한 결과는1970년대, 웅거스의 미국 시기 그의 가장 중요한 두 개의 프로젝트에 나타나는 증거가 되었다. 그것은 서베를린의 두 지역을 위한 도시 디자인 제안이었던 Tiergarten Viertel 과 Lichterfelde 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