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O.M.Ungers의 The Dialectic City의 서문을 번역하여 옮긴 글이다.
The Dialectic City
도시는 아직도 통합된 시스템으로 디자인되고 지어지고 있다.
블록구조는 특히 단단하고 튼튼해 졌다. 독립적 건물이나 리본형태의 개발은 점점 더 적어져서 이제는 정말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Miletus 같은 고대 도시에서부터
19 세기 맨하튼까지,
크기의 변화를 뺀, 실질적 변화는 매우 적다. 셀틱의 정착지 같은 도시의 구조도 세인트 페테스버그 같은 복잡한 구조의 도시의 구조와 실질적 차이는 미미하다.
사실 격세유전의 모든 선형의 마을구조도 베른 같은 도시나 현대도시의 이성적 디자인을 만드는 기본적 원리와 같은 것이다. 그저 선이 동서로 나야 할지 남북으로 나야 할지, 혹은 구조가 지형을 따를지 교통의 흐름을 따를 지를 정하는 정도가 문재가 될 뿐이다.
수천년간, 도시 디자인은 무한한 형태의 변화를 갖는 몇 가지 기본 패턴에 종속 되 있었다. 블록의 형태는, 고적전유물과 제국시대 때처럼 레귤러 할 때도 있었고, 가끔은, 중세 시 때처럼,
거의 임의적인 형태일 때도 있었고,
혹은 1930년대, 비엔나 처럼 매우 모뉴멘탈 한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블록을 구성하는 가로, 도로, 아트리움, 코트야드 그리고 광장 같은 기본적인 타이폴로지는 변하지 않았다.
이밖에, 하나의 독립적인 빌딩도 토포스(topos)이다. 모든 고대의 농장, 모든 마을은,
주거 군락,
창고, 마구간, 그리고 부속건물들 같은, 특정한 목적과 필요에 의해 구성된 하나의 인접한 빌딩들로 이루어져있다. 반면에 현대의 도시는 다른 구조간의 헐겁고 다소 차이가 나는 집합체다. 이들 사이에는, 중세도시의 교회로의 형렬 같은, 다양한 목적의 통로나 대화의 라인이 있었다. 도시의 구획도
, 교회, 시청, 학교 같은 공공 빌딩이 덧붙인,
같은 원칙을 따른다.
비슷하게, 현대, 산업단지는 다용도 시설과 산업 빌딩, 그리고 가끔은 주거지와 공공시설이 합쳐진 실용적 집합이자 축척이다. 이런 기본적 패턴에서,
도시의 질서나 혹은 무질서는 시골정착지나 역사적 도시 정착촌의 실증주의적 구획과 닮아있다.
혼자 놓인 빌딩들이 무질서한 것과 같은 시스템은 현대 도시지역에서 고층빌딩들이 임의적으로 놓여 있는 곳에서 명백하게 나타난다. 빌딩들은 전체 시스템 상에서 차별화를 시도하는 어떠한 참고도 없이 다른 빌딩들과 나란히 놓여있다. 자치적이고 자율적인 사이트의 위치와 재료의 선택으로 인해 빌딩들은 서로 관계가 없다.
어느 시기든지 그 시에 필요와 목적 맞는 기본적 패턴의 상자에 맞는 빌딩 블록이 선택되었다.
그 과정은, 주어진 시스템의 독점적 통달을 주장하는 것과 합치가 않는다면 참을 만 할 것이다. 블록 속의 정리된 빌딩이나 오래된 독립적 빌딩, 평등한 선형 개발 이나 위계에 맞춰서 축조된 기하학적 형태,
중심적이나 분산적 배치 등은 그 안에, 역사를 통해 그 실행 가능성을 증명해 왔고 미래에도 역시 많은 방법으로 또 다시 적용할 수 있는 도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이 시스템을,
조형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혹은 기술적 요구를 고려하지 않는 고립상태에서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독립적으로 적용하고 이 시스템을 관념적 툴로 악화시킬 때 가장 큰 문제가 발생한다.
현대 도시는 복잡한 구조이고, 그들의 복잡한 요구사항들 때문에 더 이상 단일하고, 균일한, 순수 시스템 안에 들어 맞지 않는다.
심지여 르 꼬르뷔제, 미스 반 데 로헤, 그로피우스에 의해 나타난 초기의 영웅적 모더니즘 시기에도, 건축가들은 도시를 한결같이 균일하게 구성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제공하고 또한 정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새로운 시대의 지지자에 의해 제시된 도시 개발방법들, 그것이 그로피우스와 그의 동지들에 의해 제안된 맑스적 선형적 개발이든,
르 꼬르뷔제의 거대 한 제안인 “ville radieue” 이든지 간에, 구조주의자들이 제안한 도시 선형 개발 혹은 미스 반 데 로헤와 힐버자이머의 생태적 모델 모두 다 처절하게 실패했고, 심하게 회손된 조각이 되어 도시 계획의 역사 속을 사라져갔다.
이 모든,
선의로서, 심히 관념적 노력들은 최대한 낙관적으로 보았을 때 도시의 복잡한 문제를 정리하고 컨트롤하기 위한 어려운 여정 위에 발생한 실험적 시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우리는 완성적이고 자기 만족적 도시 시스템을 찾으려는 시도는 애초에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점에 도달했다. 현대성은, 이미 오래되고 낡은 언어로 생각되기 때문에 이런 관점에서 실패했다.
현대성이 어디에나 맞는 시스템을 찾는데 성공할 것에 관한 한 더 이상 어떤 의문이 없다.
이 실패는 노력이나 모자랐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잘못 진행된 이론적 접근 때문이다. 도시 계획가들은 ' 새롭게 보충한다,
보안한다, 혹은 중첩한다'의 관점에서 주장하는 대신, '기존 관념에 대한 반대, 적대, 새로운 것 과 오래된 것, 현대성과 전통, 혁신과 반동' 이라는 측면을 강조하여 주장했다.
테제와 안치테제간의 연결점을 구성하는 대신에, 도시 개발자들은 이 둘을 갈라놓고 반대했다. 현대 도시 디자인의 실패는 테제에 대한 독점적인 집중에서 기인했고,
현실의 완전한 이상화를 통해서, 이질적 번식과 비슷비슷 하고 흉물스러운 전형적 모던 도시의 형태를 만들어 냈다. 깨끗이 치워지고, 정리되고, 규격화된 모던도시의 이상향은 그 믿음이 완전히 쇠퇴하고 희망 없이 썩어갔기 때문에, 더 이상 누구도 상관하지 않는 이상향과 반대로 물질서하고, 혼돈 스럽고, 그리고 완전히 타락해 버린 무질서한 도시 확장을 만들어냈다. 건축가들이, 그들이 지속적으로 만들어 버린 도시 재난의 기억을 떨처내고 환경에 대한 주체자로서 그들의 역할을 다시 찾기 위해 반동적인 활동주의로 되돌아 갔고 그들의 모든 정력을 그들이 디자인한 건물의 입면과 재료에 쏟아 부었다는 점은 놀랍지도 않다.
미리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공할 것으로 믿으며, 멀티 미디어에 관련하여 최근에 시작된 커다란 논쟁은 기술적 도구를 통해 도시 현상에 접근하고 하고 도시를 균일한 완전한 예술로 인식하려 하는 시도의 연장선과 다름이 없다.
전통적인 방법은 전문가들을 매혹시키는 새로운 형태로 변했다. 균일한 도시는,
그것이 멀티미디어든지 개념적이든 지간에 아직도 필요한 목표로 여겨진다. 이런 멀티미디어 적인 혼돈은 단지 전체로서의 도시에 관한 오래되고 퇴색된 관념을 위한 새롭고 마술 같은 공식일 뿐이다.
이들의 무력함과 절망에서, 건축가와 심지어 도시 개발자들은 그들의 고유의 도시 이론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브리콜라주 (Bricolage)”가 바로 그것이다. 누군가는 미래의 도시를 커뮤니케이션의 영역, 즉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영원한 멀티미디어 네트워크의 장소로 보았다. 역, 공항, 회의장, 그리고 서비스 영역 등 교통의 흐름이 만나고 합쳐지는 장소는 전이적, 사회적 인터페이스로 프로그램이 된다. 도시 생활은 두 정거장 사이나 멀티미디어 인터넷 네트워크 상, 모뎀이나 데이터 하이웨이 에서 생성이 된다. 실체적 만남은, 지속적으로 변하는 도시의 세트 메뉴로 대치되고,
마음대로 교환된다.
기껏해야, 도시에서 삶은 티브이 스크린이나 역사의 플랫폼 위에서 살아남는다. 도시는 이제 공항과 같다, 다시 말해서,
도시라고 할만 한 것은 이제 없다. 그것들은 이제 거의 기회가 만나는 장소로 분해 되었다.
도시는 더 이상 머무르는 장소가 아니고, 연속성은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대체 되었다.
연속적이고, 전통적인 그리고 설립된 장소는 입장을 밝히지 않는 어정쩡한 데이터의 정보시스템 속으로 흡수되었다.
멀티미디어 타운은 시간과 장소의 영역 밖에서 존재한다.
그것은 역사도 이름도 없이 계속해서 변화한다. 멀티 미디어 타운에서 지속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얼굴도 없고,
형태도 없는,
지속적 변화의 미래에 대한 끝없는 믿음에 반향을 일으킨다.
그곳에는 장소대신,
잠시 동안 정보가 연결이 되는 장소인 네트워크 인터페이스가 있다. 네트워크 내의 간극들은 동시적이면서 무작위 적이다. 그들은 거의 서로 가까이에 있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러나, 라보나 광장은 인터넷상에 존재하는 장소가 아니다. 그곳은 연속성을 반영하고 보이는 형태를 바꿔온 자기만의 역사를 지닌 장소이다. 이것은 영속적이다. 멀티미디어의 환영이 아니라, 이곳은 스쳐 지나기 보다 그 안에 사는 실제이고 독특한 공간이다. 도시가 인터넷 상에서 그렇게 보인다 하더라도 도시는 사실 공항이 될 수 는 없다. 도시는 아직도 그 구조와 형태가 영속하는 공간이다.
누군가는 유목민적 건축에서 구원을 찾으려고 하고,
미친듯한 즉흥성이 모든 것을 치유할 것이라고 믿지만, 다른 누군가는 역상의 상태로 빠져들어서, 스스로 영속성을 증명해온 오래되고 잊혀진 도시 개념을 찾아냈다. 그들은 예술적 본능 과 회화적 센스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들은 감지할 수 있고 이성적인 생각을 회화적이고 은유적인 이미지로 대치한다. 이제 도시 공간은 주관적인 추측,
그리고 어떠한 설명도, 합리화도 필요 없이 창조자의 경험에서 이끌어진, 부유하는 아이디어 에서 이미지를 끄집어내어 창조 할 수 있는 능력에 관한 문제이다. 이 사실은 관광객이나 구경꾼들의 입맛에 매력적으로 보일 만한 놀라운 작업들을 만들었다.
우리는 판타지 나라와 완전히 키치한 모방의 세계와 가깝게 있다.
도시 집중화 속 운동의 두 극단,
가상의 도시 그리고 판타지 랜드 는, 도시 개발자들이 현재 직면한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한 보충적 전략이고, 사실상에 거의 현대 도시의 혼돈에 대응하려 한 희망 없는 시도일 뿐이다.
두 전략 모두 학문적 쉐도우-복싱을 하거나 자기들끼리 영감을 주고 받으면서 스스로 지쳐버렸다.
한쪽이 미래에 대한 시각적 추측 속에서 자아를 잃으면 잃을 수록, 다른 한쪽은 모델과 은유의 몰 이해의 늪 속에 더더욱 깊게 자리잡게 된다.
어느 것도 보충할 만한 전략으로 사용되질 않는다. 유토피아도 퇴행도 믿을만한 모델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이 아이디어는,
복잡한 도시 시스템에 대한 하나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할 만큼, 너무 독점적이고 비현실 적이다. 그래서 이 두 전략을 버리고 이 추측에 근거한 꿈은 미디어 전문가나 역사가들에게 남겨 두는 것이 훨씬 낫다.
하지만 이상적 도시 디자인을 정의하려는 어떠한 시도들도 시작부터 실패할 운명에 처해있다. 이상주의 도시의 세기는 더 늦지 않다면 후기 르네상스 시대 때 끝이났다.
특히 19세기에, 도시를 이상화된 스트라잇 자켓에 우겨 넣으려던 많은 시도들이 산업과 사회의 대격변으로 인해 크게 실패했다.
이탈리아 파시즘을 선두로 한, 모던 도시 계획가들은 전반적으로 설득력 있는 도시를 창조해내지 못했고,
결국에 새로운 도시를 만들어내는 시도를 통해 이렇다 할 진보를 이루지 못했다.
같은 것들이
2차 세계 대전 후에, 자동차나 사회적 균형에 관한 관념을 반영하려던 시도들에 적용되었다. 20세기 후반의 도시들이 하나의, 하지만 절대적인 계획안에 통합되기에는 너무 이질적이고 모순적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명백하다. 현대 도시는 하나가 아니고 많은 장소이다. 도시는 상호 보완적이고 연관된 생각과,
개념 그리고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복잡하고,
다층적이며, 다채로운 구조이다.
그 크기가 어찌 되었든지, 현대 도시의 문제는 중심지역 보다는 주변지역에 혹은 중심과 지역간에 상호관계에 있다.
파리는 아마도 환형 녹지와 교외
(Banlieues)로 둘러싸이고 거의 묶여 있는 가장 극명한 유럽형 도시의 예이다. 심지어 작거나 중 규모의 도시에서도 주변부의 확장은 컨트롤이 불가능 해 보이는 도시 질병이 된다.
도시의 주변에서,
산업 단지,
상업 빌딩 군, 그리고 쇼핑몰 들이 암처럼 증식해 가고, 전통적인 도시의 삶은 이런 지역으로 점진적으로 옮기도록 위협을 받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점점 도시의 모습을 바꾸고 있다.
복잡해진 도로망,
분산화된 서비스,
생산 지역들,
중심의 분산배치,
등등은 어떤 미적 아름다움이나 이성적 의미가 없는 미완의 구조의 번식을 가져왔다.
동시에 남겨진 내부의 도시는, 역사적 건축적 도시의 구조를 보존해야 한다는 반론할 수 없을 정도의 필수적 압력으로 인하여, 해결 할 수 없는 경제적 형태적 문제가 된다.
하지만 도시의 딜레마는 그저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기술적인 것 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디자인의 문제이다.
모든 도시 계획은, 실질적 속박과 사회적 필요성, 당시 상호간에 독립적인 도시 시스템을 이성적 시스템이나 어느 정도 논리적인 전략과 통합하려는 방법을 제안하는 것과 같은 사건에 의해 태어난 실증적 도시 구조 속으로 체계를 가지고 들어 가는데 주로 관심을 두고 있다. 과거에 적용하던 계획의 방법은 더 이상 현재의 도시에 들어맞는 전략을 제공하지 못한다.
규격화를 향한 과거의 시도들과는 다르게, 우리는 차이와 미해결의 모순을 아우르는 두 가지 도시 전략을 설명을 통해 제안 하려 한다. 이 두 전략은 ‘Nikolaus van Kues’ “무지의 학습 (docta de ignorantia)”에 기본을 두고 “ 대항간의 우연적 일치(Conincidentia oppositorum)”에 대하여 고민한다.
두 전략은 다음과 같다.
1. 상보적인 공간의 전략
2. 중첩된 층으로서 도시의 전략
2. 중첩된 층으로서 도시의 전략
작은 마을, 작은 도시, 혹은 이상적 도시와는 다르게, 거대 도시는 더 이상 획일적이지 않다. 도시는 이질적 다른 요소, 시스템 그리고 기능들의 이질적 통합이다. 큰 도시는 지역으로 확장한다 그리고 , 조각적이고, 스스로에게 놓인 다양하고 자기 모순적인 요구에 때문에 더 이상 일관성 있는 시스템과 통합될 수 없는 열린 구조이다.
현대 도시는 변증법적이다.
도시는 동시에 테제이면서 안티테제 이다. 도시는 사회적 모순을 반영하면서 동시에 자기의 기술적 시스템을 반영 한다. 이제는 더 이상 획일화된 형태와,
19세기까지의 역사적 도시들처럼 모든 것을 하나의 시스템 속의 일부로 포함시키는 한결 같은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없다.
포괄적 유닛으로서의 도시에 대한 생각은 역사의 흐름 안에서 너무도 무상하다 그리고 남아 있는 것은,
변태적이고 방종한 거대한 사마귀 같은 것이 되려는 복잡하고 거의 컨트롤 할 수 없는 장치이다. 독립적이고 이름을 정할 수 있는 장소들은 중심도시의 해체에 대한 향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결 같은 관념이 되는 대신,
도시는 이제 “상보적인 공간”으로 구성된 구조이다.
유흥, 상업, 문화, 주거 그리고 업무 공간 같이 많은 대비적인 공간들 함께 느슨한 도시 조직을 형성한다. 기술과 문화적 요구로 만들어진 모던 도시는 뒤죽박죽의 것들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상호간에 보완적이고, 중요한 장소의 시스템으로 만들어진다. 그것이 왜 적절한 방법이, 부족한 기능을 더하거나 존재하는 것을 완벽하게 만듦으로써 장소를 정의하고 장소의 특성을 개발하여,
확연히 다른 공간들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발견돼야 함이다.
“상보적 공간”으로 만들어진 도시는,
전체를 바라보는 특별한 도시의 일면의 각각에 들어 있는 다른 부분들의 거대한 가능성의 다양함으로 구성된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도시 속의 도시” 시스템이다. 모든 부분은, 스스로 완성적이고 자기 완결적이 아니면서도, 자기만의 특별한 특성을 가진다. 이런 경우에는 오직 주거, 문화, 혹은 상업적 일면들이 고도로 개발이 되고, 그래서, 고도로 개발된 다른 지역과 합쳐지면서, 연방정부 형태의 복잡한 도시를 구성한다. 상호보안적 공간의 예는 그곳이 산업 지역이거나 거대 휴양지든지 간에 역사적 도시라기 보다 주변의 정착지들 이다.
이런 공간들은 위계적으로 구성된다. 어떤 곳은 중요하고 어떤 곳은 덜 중요하다. 그곳의 가치는 관념화된 개념에서 가 아니라, 장소 그 자체에서 나온다. 이것이, 높거나 낮은 빌딩, 거대 규모 나 혼자있는, 어떠한 빌딩 형태의 원리든지 가능한 이유이다.
구조적 형태는 배타적이라기 보다 통합이고, 다양하고, 그리고 가능한 한 이질적이다. 목표는 통합성이라기 보다 다양성이다. 모순과 대립은 시스템의 일부이고 해결되지 않은 체 남아있다.
목표는 그것들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분명하게 경계를 표시하는 것이다. 모든 부분과 장소는 스스로 존재하고 오직 다른, 자족적 공간 과의 관계 안에서 발달한다. 장소들은 강점 과 단점이 될 수 있는 특성을 가진 소우주, 즉 독립된 세계와 같이 완전히 자주적인 독립체이다. 그리고 이는 도시의 대우주에 통합 되고, 매트로폴리스 와 자연은 이렇게 작은 세계로 구성된다.
도시 디자인의 기술은 혼돈의 도시 안에서,
장소에 이름을 붙이고 장소들이 가진 특별한 특성을 발견하고 인식함으로써 만들어 진다.
그래서 도시 디자인은 발명의 예술이라기 보다 발견의 예술이다.
기술적이든 아니든 다른 시스템은 더해지지 않는다. 기회, 필요, 부족함을 통해 존재하는 것들은 레이어로서 받아드려 지고 여겨진다.
다양하게 존재하는 요소, 부분 그리고 조각들은 그들의 장소와 공간에서 새로운 도시 구조를 만들고 발전시킨다.
상호 보안적인 공간으로 만들어진 도시는 열려있고, 혼합된, 적응할 수 있는,
유용한, 비 관념적인, 가식 없는, 과거를 보전하면서도 쇄신을 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이 된다.
모던 시대의 도시를 구성하고 정리하는 두 번째 개념은 “ 층으로 구성되는 도시”
이다. 도시들은 그것이 보완적이든지 아니면 전혀 맞서서 다르게 겹쳐있는 일련의 층들로 이루어져있다.
교통, 공급과 서비스, 공원, 수계, 빌딩 같은 다양한 시스템들은 개별적으로 복잡한 도시구조의 일부분으로 여겨진다.
이것들은 격리 될 수 있고 그러므로 사용과 작동에 용의 하다. 시스템은 추가 될 수도, 적어 질 수도, 딱 떨어질 수도 혹은 바뀔 수도 있다. 각각의 독립적 시스템은 다음에 영향을 주고,
수정을 하고,
혹은 바꾼다.
압력과 필요로 실제 하는 것들의 중첩은 이상적 구조 컨셉을 수정한다 그리고 이는 단편적인 구조를 만들어낸다. 폭풍처럼 도시 속으로 팽창해 들어간
19세기철도 네트워크 같은, 심지어 자존적 기술 시스템 역시도 이성적인 형태로 건설될 수 있다. 이것은 지형적이고 역사적인 요소들에 의해 거의 수정되지도 도입되지도 않았다.
이것은 독특하고 예측 불가능한 결과를 초래한 도입상의 모순과 문제를 가져왔다. 이것들은 도시를 해답 없는 상호간의 갈등의 연속체로 바꿔놨다. 하지만 갈등, 조각, 풀리지 않은 모순, 그리고 대립은 “중첩적 도시”의 특징적인 기준이다.
오래된 도시의 레이어들처럼 , 다양한 구조들이 중첩된다.
방법은, 영향을 모니터하고 고려하면서, 그리고 창조적인 결과를 활용하면서, 새로운 각자와 좀더 완전환 시스템에 다른 레이어가 덮어 씌워지는 것으로 구성이 된다.
그래서 도시 디자인은 순수하게 감성적 프로세스에서, 모든 결정과,
더 나아가 모든 복잡성의 단계가 감시되고 이해가 되는 합리적 과정으로 바뀐다.
각각의 레이어들은 우선 순위에 따라서 가치가 메겨지거나 강조될 수 있다. 이것은, 개선을 위해서 순수하게 어떤 느낌과 갑작스런 영감을 기본으로 하는 일반적 욕망으로부터 도시 디자인을 자유롭게 한다. 아트는 올바르게 분류하고 확인하고 그리고 중첩된 시스템간의 서로 주고 받는 영향을 평가함 이다. 합리적 결단을 내리기는 주관적인 느낌을 대신한다.
“ 상보적인 공간으로서의 도시”
의 형태학상의 접근에 대한 보완하는 구조적인 접근으로 이해 되어질 수 있는 “ 중첩된 층으로서의 도시”
전략은 너무도 당연하게 도시를 복잡한 단일 채로 보고 현실적 언어로 현대 도시를 고려하고 추정한다.
도시가 하나로서 움직인다고 보아야만, 그것의 분명한 다양성과 복잡성을 가져오는 긴장과 대립은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것이 된다. 만약 당신이 도시의 일시적인 성격을 좋아한다면,
마감되지 않는 것은 기초이자 도식계획의 대상이 된다. 형태와 공간의 다양성은,
명백하고 엄격하게 정의된 과정의 결과 이자 국제적이다. 이 과정은 형태학적이고 역사적인 요소들과,
기술적 과정 에 더하여 사회적 필요와 형태적 컨셉울 고려한다. 아무것도 사전에 정해지지 않는다; 모든 결론은 하나하나 다르게 정해진다.
계획에 접근하는 “중첩된 도시”는, 혼돈하는 현 시대 도시의 통합체를, 고도의 복잡성의 수준을 유지하고, 심지어 가능하면 수준까지 높이는, 정돈되고 합리적인 구조로 바 뀌는데 필요한 도구와 언어를 창조하는데 그 의의를 둔다.
이 방법은 도시의 두서 없는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디자인 되어서, 도시 개발이 실험적으로 검사되었다는 가정에 기초하여,
질서 정연하게 계획된 선에 이끌어 지고 따라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