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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April 26, 2014

환유의 풍경

환유의 풍경


2014 서울에는 전에 없던 건물이 들어섰다.  Zaha Hadid 디자인한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이하 DDP) 독특한 형태로 세간의 관심을 받더니 건축물과 지역성의 간극, 천문학적 건축비용, 스타 건축가의 태도, 대규모 프로젝트에 대한 로컬 건축가의 배제, 건물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들, 그리고 기술적 성취 등등, 많은 말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모든 사건들이 그렇듯 동안 들썩이던 세간의 관심도 태풍이 지나간 바다처럼 잔잔해 졌다. 주변 상인들도 혹시나 했던 건물이 집객 효과도 초반에 반짝한 뒤로는 달라진 것이 없다며 시큰둥한 표정이다. 건물은 그렇게 일상에 안착했고 도시의 일부로서 이상하면 이상한 대로 어떻게든 사용이 것이다.

현대 건축의 규범과 스타일은 모더니즘에서 기인한다백여 , 전통과 결별한 새로운 시대에 대한 유토피아적 아이디어들은 동시대 건축가들에게 새로운 건축에 대한 부푼 꿈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정말 건축을 통해서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사회를 있을 것만 같게 했다. 하지만 모두가 밝고 건강하고 쾌적한 공간에서 삶을 영유하는 모던적 가치가 현대까지 그대로 계승된다고 하여 건축을 사회 공공선을 실현하는 하나의 방편으로만 본다면 건축의 생산과정에서 건축가가 겪는 내적 창조과정은 심각하게 왜곡될 밖에 없다. 건축은 특정 공간과 건축가 개인의 감성의 링크가 분명히 존재 하는 장르이고 작가로서 건축가가 느끼는 공간에 대한 감각은 내가 건축을 하는데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악성의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을 솔직하게 보지 못한다면 건축가는 스스로가 정한 가치와 규범에 순간 위배되는 비극에 빠질 것이다. 그리고 21세기 서울에 Zaha Hadid 건물 같은 것이 들어섰는지에 대한 의문에도 제대로 대답할 수도 없다.

건축에서 문제해결 방식은 사회학자들이 하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후자가 현상의 구조적 이해를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적 시스템을 제시한다면 건축은 그것이 진짜 문제를 해결할지 못할지는 사실 알지 못한 , 심지어 기대도 없이 대안을 제시한다. 건축가가 제시하는 사회문제에 대한 해결책들은 사회학자들이 문제해결을 위해 사회현상을 다각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해서 내리는 해결책과는 전혀 상관없는 그야말로이런 어떨까? ‘하고는 문뜩 던지는 제안과도 같다. 그리고 나는 세상에 대한 실질적인 이해 없이 주어지는 이러한 제안들에 순수한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건축가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에 관심을 기울이고 문제를 직시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제안한 결과물이 실재 사회에 발전적 결과를 가져온 다면 더욱 좋은 것이고, 실제 그런 경우도 많다. 다만 의도를 그렇게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건축행위의 프로세스는 통념적인 문제 해결의 프로세스와 결단코 다르다. 요는 건축생산의 궁극적 목표가 기능주의에 입각한 공간의 제안이 아니라 나는 어떤 건축물을 만들고 싶은가에 대한 대답이기 때문이다. 물론 90년대 MVRDV, OMA 처럼 사회현상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데이터를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건축을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경우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수집된 데이터가 피지컬 건축이 되는 순간은 참을 없는 비논리의 세계이고, 건축가는 순간 동안 새워온 논리의 존재가 한없이 가벼워 지는 무중력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마지막 최종의 형태를 결정하는 순간에는 데이터도 주어진 논리도 아닌 결국 건축가의 독립적 규율과 감각이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때문이다.

건축은 어쨌거나 구축의 활동이고, 텍토닉을 제외한다면 모두 보여지는 부분으로 구성된다. 보여진다는 것은 피아의 세계를 설정하는 것이고 끊임없이 자신을 공간에 서있게 한다.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모호해진 체로 그렇게 압축된 추상의 결과물은 현실세계에서도 사람이 직접 대면한 상태에서 감각을 통해서만 느낄 있는 것이다. 건축물이 서있는 지역과 대면한 해결할 있는 사회적 문제라는 것은 필요한 공간을 제공하는 기능적인 말고는 다분히 제한적이고 직접적이다. 그것은 건축물이 공간을 어떻게 점유하고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정도의 역할을 뿐이지 건물이 능동적으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기대 수는 없게 한다. 건축가들이 사이트를 방문하고 주변을 살피고 문제를 찾아서 그에 따라 공간을 구성한다는 논리는 진정 사회문제를 해결 한다기 보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건축을 생산하기 위한 설득의 논리를 만드는 내적 당위성을 만드는 것일 뿐이다. 건축가들이 사이트에서 발견한 문제라는 것은 사실 의도적으로 프레임 것이고 건축가는 이미 문제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공간에서 건축가가 건물이 되고 방문자가 되면서 떠올린 심상의 이미지가 현실이 되는 과정을 건축적 문제해결의 프로세스라고 본다면, 그래서 DDP 어떻게 주변 지역의 문제점을 해결했는가를 묻는 것은 옳지 않은 질문이다. 우리가 진정 물어 봐야 것은 DDP 우리 사회와 동대문에 무슨 질문을 던지냐는 것이다.

 전통 건축에서 미적 퀘스트는 현대의 건축에서처럼 논리의 세계를 짐짓 무시하면서 진행되지 않는다. 서구의 전통 건축의 보여지는 부분들은 건물을 통해 건축 , 건물의 용도, 건축가의 자아까지 드러내는 사회 문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고,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건축가는 적극적으로 건물의 장식이나 형태들을 드러내야 했기 때문이다. 건축가의 미적 감각과 결과물이 좋다면 이는 건축가의 인기로 직결이 되었고 이에 따라서 건축가는 자신의 미적 성취를 위한 동기로서 장식에 대한 사회적 열망을 그대로 사용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모더니즘의 도래 이후로 사정은 달라졌다. 모두가 같은 리빙스탠더드를 영유하는 모던의 유토피아적 가치 속에서 개인을 드러내는 장식은 죄악시 됐고, 건축가들도 새로운 세상에 맞는 새로운 건축을 하고 싶어했다. 건축가들은 이제 자신의 창조적 열망을 채워줄 후원자를 찾는 대신 건축적 선언인 메니페스토를 발표함으로써 자신이 추구하는 건축을 투사하는 페러다임의 본채가 돼었다. 그리고 당시 새롭게 대두되는 사회적 규범에 따라서 건축의 본질적 감각의 프로세스에 의한 결과는, 선언의 내용을 따르는 것으로, 사회적 공공선을 지킨다는 허울 밑으로 교모 하게 감춰졌다. 어쩌면 모던의 이러한 태도로 인해 건축물의 모든 요소의 모양과 사이즈와 위치가 마치 모두 타당하게 결정이 되야 같은, (정해 졌다고 말해야 같은) 유도 기능주의적 태도가 만연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원하는 건축물의 미적 성취를 목적으로 사회문제의 해결을 당위로 가지고 온다든지 하는 것도 또한 모던의 유산일 것이고 요즘에 과도하게 장식적인 파사드 시스템을 장착하고서 한창 이슈가 되고 있는 서스테인어블 디자인을 차용했다고 눈가림 하는 경우의 아마 비슷한 논리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초기 모더니즘의 물성이 사라진 백색의 건물들의 외관은 그들의 선언처럼 검소한 균질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시대를 지배하던 미감이 건물의 표면을 덮은 장식의 아름다움을 통해 격상된 자아를 느끼는 것에서 건축물의 내부 공간의 풍부함과 공간을 구성하는 질료를 통해 공간적 가치를 찾으려는 열망으로 옮겨 갔을 뿐이지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 장식을 죄악으로 규정하는 Adolf Loos 건물도 다소 심심해 보이는 외관에도 불구하고, 내부를 들어다 보면 다양한 레벨의 방들 사이의 관계와 다양한 재료의 내부마감을 통한 공간적 탐닉을 느낄 있다. 건물은 이제 겉을 장식하는 대신 공간자체의 비례로 드러나는 구조적 아름다움과 빛과 재료가 빗어내는 장엄한 분위기 만드는 것으로 사회 문화적 가치를 삼게 된다대표적 모던의 어휘로 지어진 Mies SEGRAM 빌딩과Arne Jacobsen SAS ROYAL HOTEL 보면 모던의 엄격한 도덕적 규범에서 잉태 되었다 하더라도 모던의 어휘는 결국 스타일로 남은 것일 뿐임을 있다. 다소 심심해 보이는 건물의 외관은 현대성이란 새로운 가치를 얻었고 외부와는 분리되어 내부공간은 이제 고가의 가구와 재료로 마감이된 럭셔리한 공간이 되었다.

이와 같이, 애초 모더니즘의 아이디어와 실재적 건축사이의 간극이 용인될 있었던 것은, 첫째로 모더니즘의 아이디어가 암묵적으로 계급사회가 가지고 있던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적 공공선을 지키고 있다는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건축물이 모던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진정성과는 별개로 선언적이 나마 아이디어를 실현하고 있다고 에둘러 말하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둘째로 사회적 규범이 느슨해지고 변했다고 해도 다른 형태로 권력을 , 자본이 권력으로 대체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만의 가치를 드러내길 원하고 그러기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자본을 건축적 재화와 교환하려 한다는 점이다. 건축가는 이점을 이용해서 전통 건축에서 그러했듯 자신의 건축적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당위로 삼았다. 그렇지만 여전히 설득의 과정에서 건축가의 내적 규율은 교묘히 무시된다. 셋째로 아무리 위대한 건축가의 전복적 선언일 지라도 시간이 흐르면 너무도 당연한 어휘로 고착이 되거나 스쳐가는 스타일로 여겨지기 때문에 모던의 어휘를 사용하는 건축가도 대중도, 아무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결국 사회의 고도화 속에서 짐짓 모른 모던의 가치는 너무 낡은 것이 되었고. 스타일로 존재하던 모던의 어휘도 복잡한 사회의 다양한 요구를 담아내기엔 너무 제한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없었다. 더군다나1950년대 이후 전후 복구와 사회적 문제의 해결에 동기를 두고 지어진 많은 모더니즘의 건물들이 슬럼화를 되는 등의 실패를 목도하면서 건축가는 새롭게 자신의 건축을 투사 논리적 기반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포스트 모더니즘이 도래했고, 기간에 벌어진 건축의 표면과 형태에 대한 몰두는 기존의 메니페스토를 대신해서 건축가의 미적 결정에 대한 이론적 철학적 기반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포스트 모더니즘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하고 피상적인 인식론, 존재론, 감각에 대한 담론의 횡행 속에서 당시 문화와 스타일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데 그쳤다는 비판을 받으며 막을 내렸다. 과정에서 학계는 프랙티스와 멀어졌고, 건축가는 더더욱 이해 없는 존재가 되었으며, 건축은 과거, 내부에서 시작해서 밖으로 나아가던 논리적 텍토닉의 중요성이 짐짓 무시된 채로 밖에서 시작해서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론이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90년대 이후 컴퓨테이션의 도입으로 더욱 가속화된 이러한 흐름은 외부에서 보았을 건축물의 내부를 전혀 가늠할 없고 텍토닉 또한 읽히지 않는 비균질의 공간을 만들어내게 이른다. 역사 이후에 레퍼런스 자체를 찾을 없는 프리미티브한 이러한 공간의 형태는 논리적 해설의 부제에도 불구하고 형태 자체가 가진 생경함 만으로도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시작했다. 비균질적 공간들은 전혀 새로운 형태가 자아내는 WOW 팩터로써의 몇번의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고도 자본주의의 승자 독식의 시스템 안에서 스타 아키텍트란 이름으로 전세계적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고도 자본주의의 끝물에 한국에 불시착 것이 Zaha Hadid DDP 이다.


DDP 형태 같은 파라메티리시즘의 장식적 표면은 사실 어떠한 정치적 스탠스도 없다. 같이 장식적이지만 누군가를 상징하거나 어떤 것을 레퍼런스로 삼지도 않는다. (물론 그녀의 건물을 보면서 고환이나 음부를 상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것 자체도 특정인을 지칭한다고 수는 없을 것이다.) 전체적 형태와 사이즈가 정해지고 사이트에 놓였을 건축물로 충분히 기능만 한다면 그저 새로운 공간에 대한 가능성 만을 존재이유로 삼는 이러한 형태는 데이터 값이 쏟아 내는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알트 중에서 누군가의 마음에 가장 들어 골라진 형태일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생겼냐고 질문하는 것도 유효하지 않고 그렇다고 알아듣게 설명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그녀의 설명대로 건물은 이제 도시의 풍경의 일부가 되었으니 좋든 싫든 참고 쓰는 밖에 없다. 다만 Zaha Hadid 건물에서 느끼는 하나의 문제가 된다면 건물이 어떠한 정치적 스탠스가 없음에도 유일하게 Zaha Hadid 그녀만을 지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직 그녀의 회사만이 현재 이러한 종류의 건축물을 정도의 완성도로 만들어 내고 있기에 DDP 언제든지 그녀와 동격의 의미로 대치된다. 그야 말로환유의 풍경 거다. 이제 일년 삼백육십오일 거대한 Zaha Hadid 와상이 있는 서울을 생각하니 결코 유쾌하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