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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June 28, 2014

Geometry. Material. Tectonic.


0.


1914년 발표한 Dom-ino 주택은 비투루비우스 이후 건축 텍토닉의 스텐다드로 자리 잡았던 원시의 헛간(by Marc-Antonine Laugier)을 대신 하는 현대적 의미의 원초적 공간에 대한 프로토 타입이 되었다. Dom-ino는 기원적 텍토닉을 강조하는 Primitive Hut 에서 더 나아가, 선언적으로 플랜과 스킨이 구조에서 완벽히 분리되어 자유롭게 디자인 되는 주택에 대한 대량 생산의 플랫폼의 제안이었다. 프리플랜을 위한 뉴트럴한 전재 조건이었을 구조가 이 제안을 통해 건축물의 스킨과 분리되어 순수하게 드러나고 비로소 인지 가능한 감각의 세계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구조를 단지 기술의 흐름으로서 이해하는 것이 아닌 현대적 의미의 텍토닉을 구현하는 요소로서 적극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완벽히 자유로울 줄 알았던 새로운 건축은 아이러니 하게도 100년이 지난 지금 (2014년) , 100년 전 스스로 만든 대량생산을 위한 조건과 자본적 한계 그리고 그 안에서의 실존적 자유가 부조리하게 얽혀있는 형국이 되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과거와 결별하지 않은 체로 미래를 현재의 연속적 선상에서 바라보기 위한 새로운 의미의 원시적 헛간은 무엇이 될 것이가?

Robert Venturi는 그의 책 Complexity and Contradcition in Architecture에서 T.S ElliotTradition and the individual Talent, 1919 의 일부를 인용하면서 전통은 자연스럽게 물려받아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노력을 통해 얻어지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는 역사적 감각을 수반하는데, 역사적 감각은 전 역사를 통틀어 과거와 현재를 인지하고 무엇이 timeless 한 것인지, 혹은 지나가는 것인지를 알아냄으로서 작가가 스스로를 전통적인 존재로 만드는 감각이고, 또한 현재의 시간과 장소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을 통해 동 시대성을 획득하는 감각으로 정의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새로운 작업을 하면서도 문화적 연속성을 확보할 수 있고 그러지 못할 경우에 작업은 피상적이고 현재에서 그 중요성을 상실할 수 밖에 없다. 그의 말대로 라면 건축가는 건축이 시간 속에 녹아 들어 과거의 것이 현재에 존재하고 현재가 과거의 것에 정의되는 역사적 연속성 안에서 그의 건축의 가능성을 찾아야 하고, 역사의 스펙트럼의 어느 곳에 자신을 투사 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많은 건축가들이 자신이 하는 작업이 진행되는 역사 속의 일반적 생산의 일부라고 인정하는 것을 주저한다. 자신의 작업이 매우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으로 믿고 현재와 선을 그으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역사에서 떨어진 채 만들어진 것들이 매우 피상적이거나 시장 경쟁의 각축 속에 만들어진 기묘한 건축물들의 형태로 궁극적으로 다름의 무더기 속에서 오히려 그 존재감이 사라진 채, 비균질의 풀 속에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더군다나 자본의 모멘텀과 집단적 판타지를 구상의 동력으로 이용하는 최근의 건축적 상황이 모멘텀 상실이라는 현실과 맞닿은 현재 시점에서 나는 오히려 건축을 구성하는 원리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고 건축 행위가 무엇을 만들어 내는 행위이며 이차적으로 이를 통해 무엇을 드러내려 하는 것인지를 밝힘으로써 오랜 역사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반복 재생산 되어온 건축만이 가지는 절대적 가치를 찾아 볼 수 있지 않을 까? 하는 낙관적 상상을 해본다.


1.


만든다는 것, 집을 짓는다는 것은 인간만의 행위는 아니다. 수많은 동물들이 살기 위해 집을 짓고 짝을 찾기 위해 혹은 적을 기만하기 위해 집을 짓는다. 물론 이런 구축을 인간의 건축과 같은 위계에 놓고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진화의 측면에서도 물론이고 현대의 건축의 복잡성을 설명하기에는 행위의 합목적성만을 두고 건축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건축기술의 진화를 통해 건축을 설명하는 것도 마땅치 않다. 고대의 석축 건축에서 부터 현대의 파라메트리시즘까지 이어지는 기술의 발달 과정은 부단한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새로운 공간에 대한 열망의 대단한 결과임은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건축기술의 발달이 건축행위와 선형적으로 일치한 체로 평행하게 진행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기술의 발달은 공간을 구성하는 논리의 체계와 재료를 다변화 시킨 것이지 이로 인해 건축이 기술에 종속 된 적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건축기술은 그것이 최신의 것이든지 아니든지 건축가에 의해 선택적으로 사용되는 것이고 필요에 의해 발전돼온 것이다.

우리는 기술의 진화가 무엇을 가능하게 한 것인지 그리고 건축가들이 기술을 통해서 하려 한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하여 건축가들이 물리적인 존재로서의 건축과 공간적 경험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고민하는 것들, 그리고 그런 인과관계로써 만들어지는 건축물에 대하여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건축은 몸으로 존재하고, 지오메트리, 메터리얼, 텍토닉로 구성된다. 지오메트리는 건축물이 외연에서 보여지는 물리적 형태이고, 메터리얼은 건축물이 현실화 되는 실체적 재료를 말한다. 그리고 텍토닉은 건축이 지오메트리와 메터리얼을 통해 공간을 점유하고 서있는 방법을 결정하는 구성적 논리의 체계이다. 이 세가지 요소들은 건축물의 생산과정에서 건축가의 내적 고민의 인과관계에 의해 드러나는 것들로써 건축가의 생각과 프로파간다, 미적 감각이 투사되는 미디어 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세가지 요소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건축물의 디자인 과정에 있었을 건축가들의 지적 고민과 의사 결정과정에 작용하는 독립적인 룰, 그리고 원리의 레이어를 확인할 수 있다.

지오메트리, 메트리얼, 텍토닉은 건축가의 의도에 따라 서로 혼합되어 나타나기도 하고 분리되어 강조되기도 하며, 때로는 의도적으로 감춰지기도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메터리얼과 지오메트리가 건축이 현실화 할 때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물리적인 부분들이라면 텍토닉은 드러나는 형태 (figure)의 기저에 존재하는 컨셉으로써 건축물이 의도된 모습으로 서있도록 하는 건축가의 방법론이다. 그래서 텍토닉은 주로 큰 틀에서의 건축물이 자세와 태도를 결정하고 대부분 구조를 통해 현실에 드러나기도 한다.

건축물이 몸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은 개인의 존재가 웹상에 존재하는 현재의 상황에서 더욱 가치를 가진다. 개인이 웹을 통해서 사회적 생활을 하고 화면을 통해서 더 많은 경험을 하게 된 시대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기술은 몸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하기 때문이다. 기술은 지속적으로 현실적 감각을 흉내내지만 오히려 현실감과 실재의 간극을 분명히 드러내고있고, 이러한 사실은 결국 사회 속에서 침범될 수 없는, 오직 개인의 감각의 차원에서만 만족될 수 있는 가치가 있음을 더욱 분명히 한다. 현실화된 건축은 몸으로 느끼지 않고는 절대 완벽히 알 수 없고, 시각과 촉각, 청각, 후각, 그리고 시간의 감각을 동시에 동반하지 않고서는 공히 느낄 수 없는, 공감각적 장르적 특징을 보인다. 그래서 대중은 앞서 말한 건축의 세가지 요소를 최초의 단서로 삼아서 건축물을 이해 할 수 있다. 반대로 건축가에게는 이 세가지 요소들이 그들의 생각을 드러내기 위한 중요한 도구가 된다.


2.


지오메리트리는 건축물이 외연에 드러나는 형태를 말한다. 건축가의 지적 감각적 비례의 체계로서 드러나는 지오메트리는 시각 이미지로 대중에게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대중은 형태가 전하는 아이디어를 즉각적 이미지로 이해하게 된다. 지오메트리는 즉물적 의사결정의 체계이고 그렇기 때문에 지오메트리는 구성적 결과물이면서도 동시에 작가의 지적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시각적 도구가 된다. 그래서 건축가들이 기능이나 타이폴로지가 강력하게 드러내는 형태를 만들어내거나, 역사적 이미지와 구성요소들의 차용해서 건축물에 드러나게 함으로써 대중이 건축을 이해할 때 그들의 자의식이 결국 건축의 창조나 비판의 일부가 되는 파라 독식한 상황을 만들어낸다.

사람들은 종종 어떤 형태에 반응한다. 지오메트리의 스케일이나 모양, 패턴에 따른 즉각적 감성의 발현은 개인의 형태와 공간에 대한 감수성, 취향, 잠재의식과 지식 그리고 기억에 관련해 있다. 건축가도 역시 건축물을 만들 때 형태에 대한 개인적 감수성에 기반해서 형태를 생산하기도 하고 대중의 반응을 교모히 계산하여 특정한 시각적 효과를 만들어내는 공간을 구성하기도 한다. 대중은 이렇게 만들어진 지오메트리에 대해 자신의 감수성과 무의식의 차원에서 감응을 하게 된다. 그래서 종종 빌딩의 형태에 대한 아름다움의 관점은 사뭇 상대적이고 주관적이기도 하다. 또한 건축물이 건축가의 미적 감수성을 따르는 통합적 형태를 추구하는 모델링의 결과가 아니고 형태들의 조합의 결과라면 건축의 아름다움은 대비와 분리에서 나오게 된다.

형태의 문제는 집단적 잠재의식이나 역사적 사건 혹은 지역적 타이폴로지 에 근거한 건축가의 연출일 때도 있다. 이때 지오메트리는 개인적 취향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적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Aldo Rossi 는 장소가 가진 역사와 관련해서 이를 반영한 건축의 형태를 만듦으로써 건축이 도시의 집단적 기억을 담는 장소를 제공하는 문화적 존재로 재 해석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Manfredo Tafuri 는 그의 저서를 통해 건축의 형태가 도시에 안에서 모순적으로 공존하는 상황을 드러냄으로써, 건축물의 형태가 도시가 지닌 문제를 드러내거고 사회적 현상을 이해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위의 예시는 지오메트리가 의미를 전달하는 일종의 심볼 혹은 언어로 읽힌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으로, 건축물이 주변과의 관계에 의해 정의 되는 메타 텍스트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지오메트리의 조합은 건축물이 서있는 지역적, 지형적, 사회문화적, 그리고 역사적 컨텍스트의 관계 안에서 건축물을 읽게 하고, 건축물이 기존의 컨텍스트의 일부로 투사되거나 컨텍스트를 초월하는 독립적 자기모순적 존재가 되게 하기도 한다.

지오메트리는 건축가의 순수한 논리의 체계의 일부로 드러나기도 한다. 많은 부분 텍토닉과 연결 지어 이야기 할 수 있지만 순수하게 드러나는 건축의 지오메트리는 의미가 거세된 상태로 건축물이 결과론적인 형태가 될 때까지 건축가가 의도한 형태적 실험의 질료이거나 메니페스토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지난 세기 모더니즘은 지나친 확신, 역사에 무심한 태도, 그리고 문화적 균질성을 이유로 비판을 받아왔지만 모던의 백색건물은 메터리알에서 벗어나 추상화된 형태가 만들어내는 순수한 지오메트리의 결과물로서 기존의 전통적 이미지의 건축에서 벗어난 건축의 현대적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형태에 대한 실험은 포스트 모던을 거치면서 역사와 기술 인문학적 가치와 결합되어서, Robert Venturi 같은 경우는 역사적 감각을 통해 얻은 레퍼런스가 동시대적 감각으로 추상화 되는 실험을 했고 건축물이 내 외부가 분리돼서 외피가 내부공간과 상관없이 기호와 의미를 전달하는 매체로서의 지오메트리를 실험했다. 그리고 Peter Eisenmann 의 하우스 스리즈는 지오메트리가 건축물이 추상화과정을 거치면서 변화할 때, 건축가의 의식의 흐름의 일부를 동결하여 만들어 질 수 있는, 건축물이 다야그램의 일부가 되는 상황을 보여주기도 한다.

결국 건축물의 형태를 결정하는 요인은 너무도 무궁무진하다. Max Bill 은 모든 형태가 오랜 경험과 사고의 진행에 의해 만들어지고, 우리를 둘러싼 많은 형태들이 완전히 다른 동기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했다. 건축에서 지오메트리도 역시 건축가의 자기 결정권의 결과이고 해당 공간과 주변을 구성하는 여러 인과관계의 통합적 결과임을 이해해야 한다. 만들어지는 것은 선형의 과정이 아니어서 거의 대부분 완벽히 기능주의에 입각하거나 오직 아름다움을 만을 추구하여 형태가 만들어 지지 않는다. 물론 형태를 위한 형태에 대한 몰두가 아주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런 유혹은 너무도 쉽게 빠지는 일 이기도 하다. 이런 유혹은 후기 르네상스의 메너리즘 건축가들의 형태에 대한 몰두처럼 건축가의 창조적 동기에 대한 각성을 일으킨 경우도 있었지만, 현대 파라메티리시즘이 직면한 셀프 레퍼런싱의 문제처럼 무한히 변형되는 형태의 유희로 인해 저작자로서 건축가의 가치마저 사라지게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3.


메터리얼은 건축물을 구성하는 실재적 재료를 말한다. 즉 구조를 구성하고 공간을 분리하며 건축물의 스킨이 되는 것들로 특히 건축물의 최 외각의 표피로서  드러나는 부분들은 개인적 차원의 경험을 공간적 차원의 경험과 연결하는 매개체가 된다. 메터리얼은 재료 자체의 물성과 색감 그리고 촉감을 통해 드러나는 깊이, 투명성, 무게, 그리고 시간의 흐름으로 느껴지는 파티나를 보여주고 공간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결정한다. Gaston Bachelard는 그의 시적 상상력의 현상학적 연구에서 형태와 재료에 의한 상상력을 구분 하여 강조하는데, 물성이 형태로 만들어지는 이미지보다 좀더 심연의 경험, 감정, 회상, 그리고 정서적 유대의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고 주장했다. 대상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시각적 이미지 보다 손으로 전해지는 감각을 통해 얻어진다는 그의 주장은 메터리알이 주는 감각이 지오메트리에 비해 좀더 감성적이고 깊은 개인적 차원의 감각과 연결돼 있음을 보여준다.

메터리얼을 통해 드러나는 분위기가 건축을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경험 중 하나인 이유는 공간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재질감, 중력 감각, 그리고 현실감이 건축을 경험하는데 부인할 수 없는 현실성을 부여하고 심지어 이를 통해 발현된 현실 감각을 통해 개인의 상상력의 영역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경험, 기억, 그리고 공간적 상황과 특정한 사건과 사고를 상상하는 일은 실재 현실과 같은 공상적, 영화적 현실감각을 일으키고 이는 다시 실재하는 공간의 세팅에 투사됨으로써 우리는 비로서 공간의 네러티브를 읽고 감상하게 된다. Jean-Paul Sartre가 주장 했듯이 안다는 것은 외부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현실에서 오는 가치가 아니라 존재하기의 특징적 방법인 것이고, 공간적 경험도 또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적 경험을 통해 공간을 자기화 하는 과정이다. 

사용자가 공간을 단지 감각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을 통해 공간이 만들어내는 환경을 스스로 테스트 하고 평가하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공간 속에 은둔 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삶의 감각과 공간을 연결 짓는다. 그래서 사용자는 오브젝트에 대한 지식을 상기하거나, 공간에 들어서서 플렌을 읽고 디테일을 인지하기도 전에 통합적으로 공간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메터리얼은 이처럼 시각적 영역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공간의 분위기를 결정지음으로써 건축이 개인의 채화된 감각과 관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Merleau-ponty 는 자신의 감각은 시각, 촉각, 그리고 주어진 소리의 총합이 아니라고 했다오히려 감각은 자신의 완전한 존재안에서 인지하는 것이고대상이 자신의 감각들에게 한번에 토해내는 유닉한 구조와 존재의 방식을 잡아내는 것이라 말했다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예술은, 갑자기, 한번에, 숨쉬는 감각에 주어지는 삶의 충격이 이어야한다고 말한 Constantin Burancusi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시간과 중첩된 메터리얼의 미묘한 이미지들은 종종 빛과 만나면서 기대치 않았던 효과나 환상을 불러 일으 키기도 한다. 이런 효과들은 마치 콜라쥬나 영화의 몽타쥬 기법처럼 분절적 이미지를 통해  비 선형의 네러티브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네러티브는 개인의 무의식 그리고 창조적 상상력과 결합하며  놀랄만한 통합적 가치를 건축물에서 불러 일으 키는데, 사실 오늘날 많은 건물들이 이러한 비선형적 네러티브들은 만들어내는데 실패를 했다. 그 이유는 많은 경우 건물이 하나의 지배적 이미지나 어떤 시스템 로직에 억눌린 채로 발전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상치 못한 경우가 아니라면, 지배적 컨셉이 건물의 시작에서 끝까지 이어져 군립하는 경우에 독립된 공간의 흐름과 건축적 장면 그리고  에피소드와 디테일이 만들어내는 다 감각적 메터리알리티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와는 반대로 지적 컨셉과 어울리는 감각과 분위기를 공간에서 어떻게 가져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Peter Zumthor 건축은 형태에 관한 것이 아니라, 다른 많은 것들에 대한 것이다. 빛의 사용, 그리고 구조, 그리고 그림자, 냄세 등등. 내가 생각할 때 형태는 제일 컨트롤 하기 쉽고, 결국에는 될 일이다.” 이라고 한다. 그에게 있어서 제일의 목표는 감성의 공간을 만드는 일이고 이것은 분위기를 만듦으로써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빛과 메터리알은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고 이를 통해 만들어진 집적된 감성의 퀄리티는 건축물의 분위기를 정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지적으로 건축물을 이해하거나 디테일을 분석하고 읽기도 전에 주어지는 분위기는 어쩌면 건축이 사회에 작용하는 숨겨진 힘이기도 하고 건축가의 직관적이고 감성적 능력에 크게 좌우되는 컨트롤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Frank Lyoid Wright 의 건물을 보거나Alva Alto, Erik Gunnar Asplund, Sigurd Lewerntz 같은 노르딕 거장들의 건물을 볼 때 명쾌하게 설명돼지 않지만 분명히 느낄 수 있는 감각 들은 메터리얼이 환경과 감성 그리고 개인의 환상과 상상력에 정확히 작용했기에 가능한 것이다이때 건축물은 주어진 기능과 목적을 넘어서서 존재 자체로 분명히 기능을 하는 것이다.


4.


텍토닉은 지오메트리와 메터리얼을 건축가의 의도대로 외부에 드러내기 위한 구성적 논리이다. 건축가는 텍토닉을 통해 건축물과 외부공간의 관계, 내부 공간들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거나 (Plan), 목적하는 공간의 미적, 기능적 퀄리티를 이루기 위한 건축물의 구조를 구성하는 (section) 통합적 사고 과정을 거친다. 하지만 텍토닉을 합리적으로 건축물을 새우기 위한 기술적 솔루션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건축의 존재의미를 기능으로 한정하기에는 현대건축의 복잡한 양상을 설명할 수 없고, 텍토닉은 문제 해결에 앞서 건축가의 독립적인 내적 논리와 의도를 우선으로 해서 나온 선택적 결과이고, 건축가는 텍토닉을 통해 건축물이 서 있는 구축의 방법과 태도를 설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텍토닉을 이해하는 일은 종종 건축물에 대한 작가의 설명이전에 왜? 라는 질문에 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되곤 한다. 

현대 조각가인 Erwin Herinch 는 그의 조각을 조형적 사고의 선언으로 규정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기하학적 형체, 즉 치수를 통해서만 조절되는 사물에 도달하게 되었다. 건축의 공간적인 규정에 있어서 예술적인 모멘트에서 결정적인 것은 치수에 관한 것이다이러한 것들은 내적인 치수를 가진 자신만의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의 이말을 통해 텍토닉에 대한 본질적 이해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건축은 어쨌거나 구축의 행위이고 이 행위는 필연적으로 작가 심연의 내적인 치수에서 발현한다. 누군가에는 동그라미, 네모, 세모이고 각기 다른 이러한 치수들은 구축의 행위에 있어서 '어떻게 만들 것인가?' 의 물음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디멘전을 제공한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컨벤션 속에서도 누군가의 건축이 꾸준히 달라 보인 다면, 그것은 그의 내적 자율성이 그의 프로젝트에서 지속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점은 어느 건축가가 프렉티스만을 쌓은 사람인지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를 구분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텍토닉의 본질이 내적인 자율성임을 이해한다면 이후의 건축 읽기의 방법은 어떤 헤게모니가 주도하는 사변적 틀을 벗고 좀더 건축가 개인에 포커스를 두고 바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미스의 건축을 설명할 때 모더니즘의 시각 일변도로 바라보는 것도 이가 맞지 않고 포스트 모던적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설명을 해도 어색하다. 모더니즘의 매스 프로덕션의 가치는 사실 Barcelona Pavilion 이나 Villa Tugendhat 에서 보이듯 매우 정교하고 럭셔리한 재료의 선정과 디테일 한 사용의 측면에서 맞지 않고, 오히려 사용자의 사회적 삶과 편의성을 중심으로 건물의 내부 공간의 퀄리티와 건물이 놓여지는 사이트와의 관계를 중요시한 건축가의 일관된 의도가 초기작인 Riehel house, krefold house 에서 부 터 Lange House 그리고 시카고의 Lake Shore Drive Apartment까지 일관되게 이어져 온 것이다. 그리고 결국 Farnsworth House 이르러 구조에서 외피가 완전히 사라짐으로서 사이트를 둘러싼 자연 자체가 내부에서 보았을 때 새로운 외피로서 확장되는 공간을 만든다. 어디서든지 같을 것 같은 인터네셔널한 이 스타일은 사실 굉장히 사이트에 오리엔트 돼있는 스타일인 샘이다. 이처럼 미스가 지속적으로 같은 맥락의 방법론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건축에서 어떤 이즘이나 메니페스토를 취하는 것은 역사적 흐름에서 자신의 스타일을 스스로 만든 선택적 프레임에 둠으로써 건축가의 독자성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수단이나 스타일에 대한 옹호의 방법일 뿐이다. 반대로 첫 번째 작품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지만 이즘의 소멸과 함께 사라진 Rietveld 같은 건축가를 생각해 본다면 이후 그의 건축이 매우 높은 완성도를 이룩했지만 반복적으로 읽힐 만한 혹은 꾸준하게 느껴지는 무엇인가가 없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해 볼 수 있다.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에 관심을 받는다. 어느 곳에 놓이거나 세워지거나 새겨진 건축은 그것이 인간의 활동이고 모든 활동은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Vernard Rudolfsky건축가 없는 건축들을 발표했을 때 저작자 없는 수많은 건축물들이 만들어낸 전통적 타이폴로지의 생경한 풍경들은 동시대의 건축가들에게 지금껏 보지 못한 강력한 시각적 충격을 안겨주었다. 원시적 문화와 환경에서 시작해서 수십 세기에 걸쳐서 그 지역에 켜켜이 쌓여온 사회 문화적 구조물들의 이미지는, 그것이 그저 흑백의 사진이었지만 그 자체로 인간의 지성과 집단적 창조력 그리고 인간의 무모하리만치 한 합목적적 에너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기후와 지형에 반응하여 공간은 어느 곳과도 다르게 구성이 되었고 건물을 이루는 지역적 재료들은 그 지역만의 독특한 감수성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혈통 없는 건축물이 삶의 형태를 구성하였다면, 이제 다소 로맨틱하거나 빈정대는 표정으로 현대 건축가들의 텍토닉에 대해서 되물을 수 밖에 없다.

건축 역사를 되집어 보면 건축이 이천년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바뀐 것없이 지속 되어온 장르임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컨벤션이 많은 장르이기도 하다. 꼭 버나큘라 건축에 대한 부분이 아니더라도 우리 지역에서 주로 보이는 건축물들에서 흔히 보이는 컨벤션들은 사실 그게 정말 옳든 그르든 수 많은 이유에 의해 쌓여온 것들이고 그렇게 쌓여있는 컨벤션을 따르는 텍토닉 만으로도 충분히 목적에 부합하는 건축물을 어렵지 않게 생산해 낼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건축을 하면서 꾸준하게 텍토닉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은 건축을 하는 원동력이 결국은 건축가 개인에게 깊게 내재한 근원적 열망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고민이 충분히 발현되어 실현됀 건축물만이 집단적 함목적성에 소멸 되지 않은채로 시대를 관통하는 문화의 일부로서 연속성을 획득 할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