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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December 27, 2016

자율성

자율성

건축물의 구축될 때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정치 사회 경제적 상황과 요구조건 안에서 건축가가 의도하는 것과 결과물과의 간극을 조율하는 과정을 거친다. 건축가는 이러한 프로세스에서 수많은 가치가 충돌할 때마다 방대한 객관화 과정을 통해 구축의 논리를 형성하게 된다. 이 과정은 많은 사람을 설득하기 위함도 있지만, 건축가에게는 그 과정 안에서 끊임없이 좌절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에 결국 자신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에 건축가는 자연스럽게 건축을 둘러싼 모든 가치와 상황이 배제된 체 온전히 건축가의 내적질서만으로 창발하는 건축에 대해 욕망하고, 그런 이유만으로 존재하는 건축적 자율성을 꿈꾸게 된다.

비트루비우스 이후로 건축물들, 특히 신전과 같은 권위를 가져야 할 공공 건축물이라면 능히 따라야 할 규범과 규율이 있다고 믿어졌고 이것을 엄격하게 지키면서 만들어지는 건축물은 이상적이고 고결한 아름다움에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은 모더니즘 직전까지도 믿어졌다. 특히 제우스 신전과 같은 그리스 신전에서 보이는 구조로서의 기둥의 놓이는 방식과 입면과 주두의 양식들이 보여주는 엄격한 비례와 수학적 강직함은 건축물에 권위를 보여주는 요소가 되었다. 하지만 이오니안 주두의 코너 딜레마에서 보여지듯 규범적인 완벽함의 추구에도 불구하고 불연속적으로 건축물에 건축가의 자의적 판단이 들어가야 하는 경우 생겼다. 그리고 이는 코리티안 주두의 발명과 함께 더욱 명확해졌다.       

고대 그리스 로마를 대표하는 3가지 기본 오더 중 가장 늦게 등장한 코린티안 오더는 건축의 향방을 건축가에게 가지고 온 결정적 발명이었다. 비트루비우스의 기술대로면 바구니에 담긴 아칸서스 잎을 그리던 Callimachus에 의해 우연으로 발명되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전해지는 것 중에 가장 오래된 코린티안 오더는 Bassae 신전의 (427 BC)의 중앙에 홀로 신성하게 놓인 것으로 이후 거의 모든 신전 건축에 열광적으로 적용되었다. 아칸서스 나뭇잎과 소용돌이 문양으로 장식된 주두와 홈이 팬 가느다란 형태로 대변되는 코린티안 오더의 모습은 다른 두 오더에 비해 복잡한 형태로 다양한 방식으로 형태적 분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단순히 규범과 비례 체계에 의해 만들어지고 놓이던 기둥은 비례적으로 올바르다면 구조적 역할을 전제로 부분적으로나마 건축가가 매우 자의적인 해석과 방법으로 변형이 가능한 부분이 되었다.

르네상스에 이르러 고전 건축에 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고 이러한 성과를 동시대의 건축물을 만들 때 적용하려는 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하지만 그 특징은 고대 건축의 철저한 규범적 재현이라기보다는 고대의 건축물의 형식미의 차용이었다. 사용되는 건축적 요소는 꼭 기술적인 형식과 기능 간의 도덕적 합일이 없더라도 얼마든지 자신의 건축물에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 되었다. 예를 들어 플로랜스에 지어진 Santa maria Maggiroe 성당에서 보이듯 구조로서 기둥이 불필요함에도 형식미를 지나치게 추구하여 시각적으로 기둥처럼 보이는 어떤 것을 만들어 놓거나 마치 그곳에 기둥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벽과 벽이 만나는 코너에 마치 기둥인 듯하게 기둥 형태의 일부를 만들어 놓는 등의 집착적인 표현이 많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관습적인 형식미의 추구는 하이 르네상스에 이르러서는 Alberti Palazzo Rucellai , Michelangelo laurentian Library에서 보이듯 건축적 요소들이 그것의 기능, 재료와 물성, 그리고 구축의 방식과는 상관없이 다소 장식적 요소로서 건축물의 표피에 압착하게 된다. 이렇게 건축물의 외견에 드러나는 형태적 유희에 몰두하는 이 시기 건축의 매너리즘적 성격과 이후 로코코와 바로크에 이르는 과도한 장식의 시기는 일견 건축 기술의 정체기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건축가에게 있어서는 이 시기가 새로운 건축의 가능성에 대한 고민과 중요한 건축적 페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는 토양이 성숙하는 시기로 전개되었다.

18, 19세기 유럽은 근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광폭한 시대적 격변기였지만 건축은 새로운 시대적 대안으로서의 건축을 만들어내는 대신 매너리즘과 장식 주의 대한 반발로서 조금 더 엄격하게 고대건축을 직접 모방하는 신고전주의나 고딕건축의 성격을 다시금 가져오는 낭만주의 건축이 등장했다. 이러한 절충주의적 성격은 에콜 드 보자르와 같은 아카데미의 등장으로서 건축직군이 디자이너와 기술자로 분화되고 건축교육에 규범처럼 차용되면서 서구사회에 더욱 광범위하게 퍼지게 된다. 하지만 이중에도 고대의 것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을 넘어 자신만의 독자적 성격을 구축한 Etienne-Louis Boullee Claude-Nicolas Ledoux 같은 건축가는 고전의 건축물을 좀 더 추상화하여 미시적이고 장식적 디테일을 넘어서는 거대하고 단순한 지오메트리의 건축물 디자인함으로써 기하학적 형태와 매스감을 통해 느껴지는 미적 경험을 중시했다. 이는 기술적 실용적 목적이나 엄격한 규범적 범주를 넘어선 것으로 표면에서 느껴지는 인상보다는 전체적 볼륨을 만들어내는 효과를 가정하는 개인적 특색이었다.

동시대의 인물로 Giovanni Battista Piranesi (1720 -1778) 는 방대한 양의 에칭 작업을 통해 근대주의 건축으로의 전환을 알린다. Giambattista Nolli의 지도(1748)를 만들기 위한 드라프트맨으로써 커리어를 시작한 그는, 고대 건축의 선례 연구하고 이를 카탈로그를 만들어서 상업적으로 이용했지만, 그의 작업은 고대의 재현으로 그치지 않았고 이를 바탕으로 존재하지 않는 어떤 공간 (감옥, 건축물, 도시)를 재현하는 작업으로까지 작업의 영역을 확장한다. 모든 것이 허구이지만, 매우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렌더링과 구축법을 잘 드러낸 도면을 통해 구체적 공간의 정념까지 보여줌으로써 그의 작품이 단순히 상상화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건축가가 본인의 내적 규율만으로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건축물을 창조해내는 자율적이고 근대적인 건축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특히 그가 그린 캄포마지오(Campo Marzio, 1762)는 로마의 테베레 강 주위에 서로 다른 시대의 건축물을 다양한 스케일로 변환하여 브리콜라주한 최초이자 완벽히 현대적 의미의 도시계획으로, 후에 Collin Rowe와 같은 수많은 건축가들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과거 양식과의 완전히 결별한 새로운 조형, 백색을 기조로 한 수직 수평의 입면과 평면, 절충주의에 반하는 비대칭적 구성, 기능주의적 가치와 생산성을 우선시하는 태도를 대표되는 모더니즘은 근대건축의 오 원칙으로 대표되는 선언적 방식을 통해 세상에 등장한다. 모더니즘은 자의성보다는 형태적 일관성을 주장하고 장식을 배제하는 태도로 언뜻 보면 금욕주의적 이거나 순수하게 기능주의에 입각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모더니즘 건축은 동시대의 추상미술 발전과 밀접한 관련성을 맺음으로써 추상 회화와 조각들이 그러했듯이 건축도 다른 시대의 것을 모방하는 하는 대신 건축적 정보의 내용을 소거하고 요약하여 지적으로 재구성한, 그 자체로 예술적 감상물의 단계까지 도달할 수 있는 새로운 추상적 미의식을 획득한다. 선이든 면이든 그것이 만든 공간이든 건축가들이 제어할 수 있는 질료가 되었고 이를 통한 구축은 실재하는 추상적 현실이 되었다. 다시 말해 모더니즘 건축이 보여주는 새로운 조형은 이전 세대와 결별한 새로운 원형, 즉 프로토타입을 만드는 일이었고 프로그램과 기능으로부터 정당화됐다는 믿음에도 불구하고 적합한 원형을 만들기 위해서는 건축가의 자의적 해석이 끼어드는 일이 불가피했다. 그렇게 원형이 만들어지자 곧 모더니즘 건축과 그들의 국제적 스타일은 전 유럽에 빠르게 퍼져나갔고 수많은 건축가들에 기호에 의해 변형되었다. 1932 MOMA의 인터네셔날 스타일 전시에서도 보이듯 모더니즘 건축도 더는 선언 속의 도덕성과 사회적 당위성의 확보와 같은 사명에서는 동떨어진, 어떤 새 시대를 대표하는 새로운 미감으로 양식화 되어 소비되었다.

두 번의 커다란 전쟁, 산업적 성숙, 그리고 이념적 혼란기를 거쳐 1,960대 말에 이르러서 모더니즘 건축은 적어도 한때 가졌던 진보적인 생기를 잃었고 근대적 합리성도 패배한 것처럼 인식이 되었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나타난 포스트 모더니즘은 다시금 건축의 역사성과 지역성을 들고 정체된 건축에 새로운 부흥을 모색했다. Robert Venturi (1925 - )대중은 백색의 무미건조한 엘리트적 건축물 대신에 역사적이거나 세속적 흥미를 자극하는 것을 원한다.”는 말로 통속적이고 흥미를 유발하는 건축물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지어진 건축물들은 절충주의 시대처럼 고대의 오더, 볼트, 장식들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닌 건축가가 유명한 건축물이나 역사적인 사건을 나름의 창조적인 방법으로 재해석하여, 아이러니한 패러디와 인용(Pastiche), 인중 코딩 같은 방법론을 통해 과장되고 키치 적으로 건축물을 디자인하였다. 이때 지어진 건축물들은 일시적 충격을 유발하나 표피적 감각에 지나치게 몰두해 있고 근대 이성에 가치를 둔 담론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예를 들어 맥락 없는 위치에 놓여있는 Charles Moor Piazza d’italia (1978, New Orleans)는 스투코(Stucco)로 만들어진 고대 로마의 건축요소들로 장식된 벽으로 둘러싸인 이탈리아 지도 모양의 연못이다. 건축물의 만듦새는 매우 조잡하기까지 하지만 건축물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그 농담 반 진담 반의 맥락 없음이 대중에게는 즉흥적 흥미를 유발한다. 그리고 실제적 감각을 알기 힘든 사진이나 영상 같은 다른 매체로 변환될 때에는 현실에는 없는 기표와 기의로 버무려진 매끈한 조형성까지도 보여준다. 하지만 포스트 모던 건축의 일시적이고 기묘한 정신 분열적이고 자기 비하적 감각들은 건축물의 상업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자본적 본성을 그 동력으로 삼고 있었기에 빠르게 확산 유행하였지만 더는 그 감각들이 새롭게 느껴지지 못할 때 더더욱 빠르게 천박하고 철 지난 것으로 취급되고 폐기 되었다. 포스트 모던 건축은 존재 본질에 대한 탐구 없는 얕음과 통제 불능한 성격으로 인해 다원적 가치를 위시한 거대한 담론으로 발전 못 한 채 역사 속에 한동안 나타난 현상으로 그쳤다.

그런데도 포스트 모더니즘의 다원적 성격으로 건축에 있어서 다양한 실험들을 가능하게 하였고 특징적인 종류의 건축으로써 레이트 아방가르드로 대표되는 몇몇 건축가들의 자기 성찰적인 작업들의 토양이 되었다. 그들 작품의 상대적 자율성은 건축이 끊임없이 욕망하는 것, 존재함으로 인해 상실할 수밖에 없는 그 간단치 않은 상황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K. Michael Hays 는 그의 저서 Architecture’s desire (2009) 에서 건축의 자율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건축은 실재의 형태적 재현들을 조직하는 조작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단순히 창조자나 사용자에 의해 어떤 이데올로기가 투입된다기 보다는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적이며, 실재적인 상황과 모순에 대한 하나의 상상적인 해결책이다.” 이렇게 건축가들은 끊임없이 현실 상황에 대한 해결책으로 상상하는 것을 구축함으로서 실재에 개입해 왔다. 현실적 상황과 자율적 욕망 사이에선 추동하여 만들어진 결과물들은 개념적 실천적인 가능성과 함께 역사적 사회적 상황 안에 존재함으로써 주변에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 이후 레이트 아방가르드 건축가들의 이론적 건축이 지나치게 현학적이고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치부되고 대신에 건축적 실천과 혁신을 옹호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여기에는 건축의 새로운 도구로서의 컴퓨터의 등장과 발전 그리고 이로써 가능해진 건축의 형태적 실험을 좀더 자유롭게 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자리한다. 비평 의식이 사라진 자리에는 그 대안적 결과물에 대한 기대감이 끓어 오르고 있었다. 디지털 기술이 만들어 내는 유일무이한 형태적 스펙타클에는 상상하는 것을 이루고자 하는 건축가의 욕망과 그것을 소비 하고 싶어하는 관람자의 욕망이 일치하는 지점이 생기고 그곳에서 건축가는 브랜드화 한다. 그렇게 건축가는 마케팅의 일부가 되고 그가 만들어낸 건축물의 스펙타클한 이미지는 자본으로 축적되고 소비된다. 그리고 애초에 희소가치를 동력으로 하는 것이기에 생산할 수록 자가 반복적으로 가치를 잃게 되는 상황임에도 건축가는 시장의 임계점까지 달려가는 자기모순적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