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컨벤셔날 건축 드로잉은 건축물과 구조를 표현하는 기초적인 드로잉들로 대부분 이차원으로 표현이 되는 드로잉들 즉; 플로어 플랜, 사이트 플랜, 입면 그리고 크로스 섹션으로 대표된다. 플랜은 모든 건축드로잉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으로, 공간을 위에서 보고 마치 지도처럼 특정 레벨에서 건축물의 내부 공간의 구성을 보여준다. 사이트 플랜은 같은 방법으로 건물이나 건물 군이 주변 콘텍스트와 어떤 관계를 설정하는 지를 표현함으로써 건축물의 레이아웃, 사이트의 바운더리, 진입방법 등이 표현이 된다. 입면은 한 면에서 건축물을 바라보고 그 장면을 플랫하게 그리는 것으로 흔히 건물의 외관을 표현하는 가장 일반적 방법중의 하나이다. 마지막으로 섹션은 건축물을 수직면으로 자른 단면을 그리는 것으로 플랜이나 입면으로 정확히 표현하지 못하거나 이해를 돕기 위해 공간의 수직적 관계나 구조를 표현하는 드로잉이다.
이러한 드로잉들은 건축가의 의도를 표현하고 건축행위를 위한 의사소통을 위한 일종의 언어로써 건축물을 구축 하는데 있어서 최초의 좌표가 된다는 점에서 정확히 그려진 드로잉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가 언어를 쓸 때는 그 언어가 누군가에 읽힌다는 전제에 있기 때문에 정확도는 물론 그 표현방식도 고려해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믿어지는 건축 플랜은, 고대 이집트 파라오인 Den setui 의 무덤에서 출토된 비석에 새겨진 그림이지만 본격적인 건축물의 표현으로서 현재까지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건축드로잉은 스위스에서 발견된 중세의 건축 플랜인 Plan of Saint Gall (820 - 830) 이다. 이 플랜은 엄밀히 말해서 실제의 건물을 위한 청사진 이었다기 보다는 이상적인 수도원을 지네릭하게 풀어서 그린 것으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중세 유럽을 강력하게 지배하던 교권의 정신적 영역을 표현한 이차원적 고민의 흔적이었다. 이 그림이 비 실제 하는 건축물을 표현했다는 점은 역설적이게도 건축 드로잉의 존재적 가치가 기능적 이유로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창의적 영역으로 확장이 되고, 그 의미만으로도 존재의 가치를 가진다는데 그 의의를 둘 수 있다. 그 이유는 건축가의 영역이 실제적 구축의 영역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제안 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축드로잉이 순수한 건축행위로서 널리 인정받고 쓰여진 것은 르레상스 시대 이후이다. 건축 드로잉이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건축가의 실존적 영역을 확장 시킨다는데 그 의미가 있지만 무엇보다 숙련공인 목수나 벽돌공과 별반 다름없이 건축 현장에서 존재하던 건축가가 현대적 의미의 건축가로 전환이 됐음을 뜻한다. 즉 드로잉이 본격적인 건축의 언어로 사용되고 이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 짐에 따라 건축가가 현장에서 분리되어 드로잉이란 언어를 통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얼마든지 실체적 구축 활동을 하는 일이 가능해 진 것이다.
예를 들어 Saint Peter’s basilica 는 1506년에 착공하여 1626년에 완공하기 까지 오랜 기간 동안 Donato Bramante로 시작해서 Giuliano de Sangallo, Fra Giocondo, Raphael - Baldassare Peruzzi - Antonio Da Sangallo - Michelangelo, Carlo Maderno 로 이어지는 많은 건축가들의 손을 거쳤지만, 최초 Bramante 의 평면의 아이디어가 그래도 계승되어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것도, 그의 건축 드로잉이 소멸하지 않는 언어로서 존재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르네상스 시기에 건축 드로잉이 크게 발달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난 천 년간 축적한 측량기술과 측량기기의 발전과 함께, 이 시기에 불기 시작한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에 대한 관심과 회기, 그리고 그를 위한, 고대 건축물에 대한 연구와 상상적 복원에 대한 관심이 증가에 그 이유를 들 수 있다. 예를 들자면, 르네상스의 대표적 건축가인 Brunelleschi 와 그의 친구인 Donatello 가 함께 고대 로마의 유적연구를 위해 로마를 방문한 것은 대표적인 일이고 (1402-1404), 천재 건축가인 Giovanni Battista Piranesi 가 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완성한 고대 로마의 상상적 복원인 ” Antichità Romane de' tempo della prima Repubblica e dei primi imperatori (1748)” 를 발표한 것, 그리고 오스트리아 의 바로크 건축가 Johann Berhard Fishcer Von Erlach 가 그의 책 “Plan of Civil and Historical Architecture (1721)을 통해 상징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역사적 고대 건축물을 그의 드로잉을 통해 재 건축해보는 기회를 찾았다는 점은 이러한 고전연구의 대표적 예이고, 이러한 고전연구를 통해 컨벤셔널한 건축 드로잉이 현실적 영역을 벗어나 상상과 실험 그리고 양식적 유희의 영역으로 까지 확장이 되었다고 하겠다.
사실상 모든 건축드로잉은 아직 실제 하지 않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려진다. 하지만 이 모든 컨벤션들이 앞으로 지어질 것을 위한 현실적 (사회적, 문화적, 기술적, 경제적 )기반 에서 그려진 것인지, 아니면 딱히 지어질 것을 염두로 두지 않은, 동 시대의 기술로는 실현 불가능한 일련의 상상 속의 유토피아나 SF적 그리고 정치적 비전의 결과물 인지, 그도 아니면 단순히 작가의 순수한 예술적 비전에 따라 현실적 제약 없이 오로지 심미적 관점과 양식과 언어의 유희적 (예술적) 감각의 표현으로서 만들어진 자유로운 실험이었는지에 따라서, 이 모든 건축적 컨벤션의 태도는 매우 달라진다. 특히 페이퍼 아키텍처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후자의 경우는 앞으로 건축이 모든 제약에 벗어나 그 외연에 존재하는 문화적 텍스트들과 융합되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고 이것이 또 다른 건축적 이슈를 만들어 내거나 새로운 분야를 창조해 낼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의 영역으로 확대 된다.
이런 의미에서 Piranesi 같은 건축가의 건축 행위는 후대 건축적 흐름의 예견적 선례로 주장될 만 하다. Peter Eisenman은 그의 렉춰 “Project and Practice”에서 Piranesi의 건축을 메타 프로젝트로서 건축적 담론의 변화를 가져왔다고 보고 그의 작업을 포스트 유토피아의 고고학적 담론의 깨우침으로 소개한다. Piranesi 가 1748년 로마에 스튜디오를 연 뒤 그리기 시작한 수많은 에칭들 (Vedute (veiw) of the City, Ancient Roman Edifice, Carceri)은, 그것들이 실제 사실과는 무관한 역사적 단편들을 공간적으로 재해석 하여 재배합하여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에칭들이 보여주는 엄청나게 디테일 한 구조와 재료에 대한 표현들도 사실은 일련의 상상에 의해 그려진 것이고 또한 실제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헤테로토피아적 상상 속 거대공간들은 오직 이 차원적 일루젼을 통해 표현되는 것들로, 결국에 이들 이미지들은 초 현실적인 공간들을 현실감 있게 재구성한 일종의 허구의 세계인 셈이다. 이는 그가 자신의 스튜디오를 연 후 지속적으로 서구의 클래식 휴머님즘을 새로운 고고학적 다론을 통해 비판해 온 것과 괘를 같이하는데, 무엇보다 Piranesi 가 당대 최고의 기술로 그려진 지도였던 Giovanni Battista Nolli 의 Nuova Pianta di Roma (1748)에 드래프트맨으로 참여한 후, 십 수 년 후에 그린 The Campo Marzio(1762)를 보면 이 사실이 더욱 잘 드러난다. Nolli의 지도에 반대의 위치로서, Piranesi의 이 지도는 더 이상 지도 안의 모든 부분이 전체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이상적 휴머니즘 속의 도시 계획이 아니다. 오히려 과거의 것들 (Plan of Hadrian Villa, Plan theatre Marcellus 등)을 다중 스케일의 다층적으로 요소로서 한 공간에 혼재되도록 재구성 재배치 하여 로마의 지형에 수직으로 투사함으로써 부분과 전체가 균등하고 대등한 관계로서 읽히도록 그린, 최초의 현대적 도시 계획 플랜이었다. 이는 기존에 엄격한 질서를 따르는 비투루비우스적 플랜의 엄숙주의와 이상주의에서 벗어나서 다양한 의도와 방법론을 통해 플랜을 그리는 건축 드로잉의 내재적 가능성을 일깨운 건축 담론의 변화를 보여준다.
플랜의 이러한 가능성은, 플랜의 작도법이 공간을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전지적 시점이면서 동시에 고 차원적 세계로의 변화를 가능케 하는 이차원적 좌표가 된다는 것 때문에, 도시화에 대응하는 급진적이고 시스템화된 아이디어의 표현을 가능케 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특히 플랜으로 대표되는 건축적 도시적 이미지들이 정치적 혁명기나 사회적 문화적 혁신기, 페러다임의 변화기에 어떤 급진적 형태나 이미지, 그리고 메니페스토로서 양산되게 된다.
예를 들어, 모더니즘의 태동하던 19세기 중반 부터 20세기 초에는 기존의 질서와 결별하고 새로운 질서를 새우려는 급진적이고 이상적인 이미지들로서 Le Corbusier의 삼백만을 위한 도시 Ville Contemporaine (1922), Plan Voisin, La Ville Radieuse (1935), Ludwig Hilberseimer 의 High-rise city (Hochhausstadt, 1924), 그리고 1920년대 러시아 사회주의의 사회적 응측기의 집합주거들 계획안들 등이 플랜의 형태로 발표 되었다. 그리고 이십세기 초 부터 이차세계대전 즈음 까지 나타난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이미지들이 유럽전역에 걸쳐서 등장하고, 전 후 잠시 낭만적 표현주의 건축계획으로서 우주적 아름다움과 질서를 추구하는 Le Corbusier의 Chandigarh(1947) 플랜과 도시의 기능적 상징적 아름다움을 표현한 브라질리아 플랜 (lucio Costa, 1957)이 발표된다. 그리고 1960년대 중 후반 이르러 비약적 경제 성장과 우주 개발 등의 과학 기술의 혁신의 시기에는 거대 구조물 등의 나이브하고 로맨틱한 SF 적 기계의 이미지들을 양산한다. Archizoom, Archigram, Yona Friedman, Paul Rudolf, Kenzo Tange, Kiyonori Kikutake, Buckminster Fuller, Paolo Solari, jean Paul jungmann, Super Studio, Justus Dahinden, Stanley Tigerman 등 이시기를 관통하는 많은 건축가들이 대표적 드로잉을 남겼다. 그리고 1970년대에 들어 포스트 모던의 등장과 그 이후로, Rem Koolhaas 를 대표로 최근에 이르기 까지 수 없이 많은 건축가들이 그들의 창의적인 비전과 실험적 아이디어를 드로잉에 담아냈다.
물론 이러한 실험적 아이디어가 컨벤셔널 드로잉만으로 이해되기는 힘들다. 특히 포스트 모던 건축 이래로 균질적으로 무한하게 확장 반복되던 공간의 개념은 지역성과 장소성이 부각됨에 따라 개별적 독립적 건물에 대한 관심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에 따라서 건축물의 개성을 표현하는 입면을 잘 표현할 수 있는 그래픽적 요소들이 건축 드로잉에서 중요성을 가지기 시작했고, 아이소와 엑소노 메트릭과 같은 수학적 삼차원 드로잉과 렌더링 같이 현실감을 주는 드로잉들의 건축에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이 중요시 되는 상황은 역설적이게도 도면 그 자체의 의미를 강조시킨다. 그것은 매체의 발달이 현대의 다양한 건축적 실험을 가능케 하고 있지만 동시에 이러한 가상 현실적 건축의 무한한 자유로움이 종국에는 사용자로 하여금 최초의 좌표로 끊임없이 수렴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대건축의 허구적 특성은 컨벤션한 건축 드로잉이 잠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앞으로도 다양한 매체의 환경을 수용하면서 끊임없이 그 의미를 가지고 사용될 것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드로잉들은 건축가의 의도를 표현하고 건축행위를 위한 의사소통을 위한 일종의 언어로써 건축물을 구축 하는데 있어서 최초의 좌표가 된다는 점에서 정확히 그려진 드로잉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가 언어를 쓸 때는 그 언어가 누군가에 읽힌다는 전제에 있기 때문에 정확도는 물론 그 표현방식도 고려해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믿어지는 건축 플랜은, 고대 이집트 파라오인 Den setui 의 무덤에서 출토된 비석에 새겨진 그림이지만 본격적인 건축물의 표현으로서 현재까지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건축드로잉은 스위스에서 발견된 중세의 건축 플랜인 Plan of Saint Gall (820 - 830) 이다. 이 플랜은 엄밀히 말해서 실제의 건물을 위한 청사진 이었다기 보다는 이상적인 수도원을 지네릭하게 풀어서 그린 것으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중세 유럽을 강력하게 지배하던 교권의 정신적 영역을 표현한 이차원적 고민의 흔적이었다. 이 그림이 비 실제 하는 건축물을 표현했다는 점은 역설적이게도 건축 드로잉의 존재적 가치가 기능적 이유로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창의적 영역으로 확장이 되고, 그 의미만으로도 존재의 가치를 가진다는데 그 의의를 둘 수 있다. 그 이유는 건축가의 영역이 실제적 구축의 영역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제안 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축드로잉이 순수한 건축행위로서 널리 인정받고 쓰여진 것은 르레상스 시대 이후이다. 건축 드로잉이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건축가의 실존적 영역을 확장 시킨다는데 그 의미가 있지만 무엇보다 숙련공인 목수나 벽돌공과 별반 다름없이 건축 현장에서 존재하던 건축가가 현대적 의미의 건축가로 전환이 됐음을 뜻한다. 즉 드로잉이 본격적인 건축의 언어로 사용되고 이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 짐에 따라 건축가가 현장에서 분리되어 드로잉이란 언어를 통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얼마든지 실체적 구축 활동을 하는 일이 가능해 진 것이다.
예를 들어 Saint Peter’s basilica 는 1506년에 착공하여 1626년에 완공하기 까지 오랜 기간 동안 Donato Bramante로 시작해서 Giuliano de Sangallo, Fra Giocondo, Raphael - Baldassare Peruzzi - Antonio Da Sangallo - Michelangelo, Carlo Maderno 로 이어지는 많은 건축가들의 손을 거쳤지만, 최초 Bramante 의 평면의 아이디어가 그래도 계승되어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것도, 그의 건축 드로잉이 소멸하지 않는 언어로서 존재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르네상스 시기에 건축 드로잉이 크게 발달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난 천 년간 축적한 측량기술과 측량기기의 발전과 함께, 이 시기에 불기 시작한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에 대한 관심과 회기, 그리고 그를 위한, 고대 건축물에 대한 연구와 상상적 복원에 대한 관심이 증가에 그 이유를 들 수 있다. 예를 들자면, 르네상스의 대표적 건축가인 Brunelleschi 와 그의 친구인 Donatello 가 함께 고대 로마의 유적연구를 위해 로마를 방문한 것은 대표적인 일이고 (1402-1404), 천재 건축가인 Giovanni Battista Piranesi 가 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완성한 고대 로마의 상상적 복원인 ” Antichità Romane de' tempo della prima Repubblica e dei primi imperatori (1748)” 를 발표한 것, 그리고 오스트리아 의 바로크 건축가 Johann Berhard Fishcer Von Erlach 가 그의 책 “Plan of Civil and Historical Architecture (1721)을 통해 상징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역사적 고대 건축물을 그의 드로잉을 통해 재 건축해보는 기회를 찾았다는 점은 이러한 고전연구의 대표적 예이고, 이러한 고전연구를 통해 컨벤셔널한 건축 드로잉이 현실적 영역을 벗어나 상상과 실험 그리고 양식적 유희의 영역으로 까지 확장이 되었다고 하겠다.
사실상 모든 건축드로잉은 아직 실제 하지 않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려진다. 하지만 이 모든 컨벤션들이 앞으로 지어질 것을 위한 현실적 (사회적, 문화적, 기술적, 경제적 )기반 에서 그려진 것인지, 아니면 딱히 지어질 것을 염두로 두지 않은, 동 시대의 기술로는 실현 불가능한 일련의 상상 속의 유토피아나 SF적 그리고 정치적 비전의 결과물 인지, 그도 아니면 단순히 작가의 순수한 예술적 비전에 따라 현실적 제약 없이 오로지 심미적 관점과 양식과 언어의 유희적 (예술적) 감각의 표현으로서 만들어진 자유로운 실험이었는지에 따라서, 이 모든 건축적 컨벤션의 태도는 매우 달라진다. 특히 페이퍼 아키텍처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후자의 경우는 앞으로 건축이 모든 제약에 벗어나 그 외연에 존재하는 문화적 텍스트들과 융합되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고 이것이 또 다른 건축적 이슈를 만들어 내거나 새로운 분야를 창조해 낼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의 영역으로 확대 된다.
이런 의미에서 Piranesi 같은 건축가의 건축 행위는 후대 건축적 흐름의 예견적 선례로 주장될 만 하다. Peter Eisenman은 그의 렉춰 “Project and Practice”에서 Piranesi의 건축을 메타 프로젝트로서 건축적 담론의 변화를 가져왔다고 보고 그의 작업을 포스트 유토피아의 고고학적 담론의 깨우침으로 소개한다. Piranesi 가 1748년 로마에 스튜디오를 연 뒤 그리기 시작한 수많은 에칭들 (Vedute (veiw) of the City, Ancient Roman Edifice, Carceri)은, 그것들이 실제 사실과는 무관한 역사적 단편들을 공간적으로 재해석 하여 재배합하여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에칭들이 보여주는 엄청나게 디테일 한 구조와 재료에 대한 표현들도 사실은 일련의 상상에 의해 그려진 것이고 또한 실제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헤테로토피아적 상상 속 거대공간들은 오직 이 차원적 일루젼을 통해 표현되는 것들로, 결국에 이들 이미지들은 초 현실적인 공간들을 현실감 있게 재구성한 일종의 허구의 세계인 셈이다. 이는 그가 자신의 스튜디오를 연 후 지속적으로 서구의 클래식 휴머님즘을 새로운 고고학적 다론을 통해 비판해 온 것과 괘를 같이하는데, 무엇보다 Piranesi 가 당대 최고의 기술로 그려진 지도였던 Giovanni Battista Nolli 의 Nuova Pianta di Roma (1748)에 드래프트맨으로 참여한 후, 십 수 년 후에 그린 The Campo Marzio(1762)를 보면 이 사실이 더욱 잘 드러난다. Nolli의 지도에 반대의 위치로서, Piranesi의 이 지도는 더 이상 지도 안의 모든 부분이 전체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이상적 휴머니즘 속의 도시 계획이 아니다. 오히려 과거의 것들 (Plan of Hadrian Villa, Plan theatre Marcellus 등)을 다중 스케일의 다층적으로 요소로서 한 공간에 혼재되도록 재구성 재배치 하여 로마의 지형에 수직으로 투사함으로써 부분과 전체가 균등하고 대등한 관계로서 읽히도록 그린, 최초의 현대적 도시 계획 플랜이었다. 이는 기존에 엄격한 질서를 따르는 비투루비우스적 플랜의 엄숙주의와 이상주의에서 벗어나서 다양한 의도와 방법론을 통해 플랜을 그리는 건축 드로잉의 내재적 가능성을 일깨운 건축 담론의 변화를 보여준다.
플랜의 이러한 가능성은, 플랜의 작도법이 공간을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전지적 시점이면서 동시에 고 차원적 세계로의 변화를 가능케 하는 이차원적 좌표가 된다는 것 때문에, 도시화에 대응하는 급진적이고 시스템화된 아이디어의 표현을 가능케 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특히 플랜으로 대표되는 건축적 도시적 이미지들이 정치적 혁명기나 사회적 문화적 혁신기, 페러다임의 변화기에 어떤 급진적 형태나 이미지, 그리고 메니페스토로서 양산되게 된다.
예를 들어, 모더니즘의 태동하던 19세기 중반 부터 20세기 초에는 기존의 질서와 결별하고 새로운 질서를 새우려는 급진적이고 이상적인 이미지들로서 Le Corbusier의 삼백만을 위한 도시 Ville Contemporaine (1922), Plan Voisin, La Ville Radieuse (1935), Ludwig Hilberseimer 의 High-rise city (Hochhausstadt, 1924), 그리고 1920년대 러시아 사회주의의 사회적 응측기의 집합주거들 계획안들 등이 플랜의 형태로 발표 되었다. 그리고 이십세기 초 부터 이차세계대전 즈음 까지 나타난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이미지들이 유럽전역에 걸쳐서 등장하고, 전 후 잠시 낭만적 표현주의 건축계획으로서 우주적 아름다움과 질서를 추구하는 Le Corbusier의 Chandigarh(1947) 플랜과 도시의 기능적 상징적 아름다움을 표현한 브라질리아 플랜 (lucio Costa, 1957)이 발표된다. 그리고 1960년대 중 후반 이르러 비약적 경제 성장과 우주 개발 등의 과학 기술의 혁신의 시기에는 거대 구조물 등의 나이브하고 로맨틱한 SF 적 기계의 이미지들을 양산한다. Archizoom, Archigram, Yona Friedman, Paul Rudolf, Kenzo Tange, Kiyonori Kikutake, Buckminster Fuller, Paolo Solari, jean Paul jungmann, Super Studio, Justus Dahinden, Stanley Tigerman 등 이시기를 관통하는 많은 건축가들이 대표적 드로잉을 남겼다. 그리고 1970년대에 들어 포스트 모던의 등장과 그 이후로, Rem Koolhaas 를 대표로 최근에 이르기 까지 수 없이 많은 건축가들이 그들의 창의적인 비전과 실험적 아이디어를 드로잉에 담아냈다.
물론 이러한 실험적 아이디어가 컨벤셔널 드로잉만으로 이해되기는 힘들다. 특히 포스트 모던 건축 이래로 균질적으로 무한하게 확장 반복되던 공간의 개념은 지역성과 장소성이 부각됨에 따라 개별적 독립적 건물에 대한 관심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에 따라서 건축물의 개성을 표현하는 입면을 잘 표현할 수 있는 그래픽적 요소들이 건축 드로잉에서 중요성을 가지기 시작했고, 아이소와 엑소노 메트릭과 같은 수학적 삼차원 드로잉과 렌더링 같이 현실감을 주는 드로잉들의 건축에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이 중요시 되는 상황은 역설적이게도 도면 그 자체의 의미를 강조시킨다. 그것은 매체의 발달이 현대의 다양한 건축적 실험을 가능케 하고 있지만 동시에 이러한 가상 현실적 건축의 무한한 자유로움이 종국에는 사용자로 하여금 최초의 좌표로 끊임없이 수렴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대건축의 허구적 특성은 컨벤션한 건축 드로잉이 잠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앞으로도 다양한 매체의 환경을 수용하면서 끊임없이 그 의미를 가지고 사용될 것임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