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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December 22, 2013

구조와 장식

구조와 장식


아돌프 로스가 장식을 죄로 규정한 것은 어쩌면 매우 자극적인 선언 인지도 모른다. 처음 건축을 공부하면서 로스와꼬르부지에를 동시에 놓고 모더니즘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으레 하얗게 칠해 평범한 면과 선의 조합이(흑백사진이라 하얗다고 생각한다.) 정말 장식을 죄악시  엄숙한 시대정신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널리 퍼진 비난으로 정말 모던에서 장식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당시의 시대정신의 일면만을 본 것이다실제 로스가 비난한 것은 과거의 장식이 이상 현재,( 당시) 기계 시대의 문화와 정신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것이지 건축가들이 장식을 통해 표현하던 했던 창조적 정신 (Creative spirit) 자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러한 정신을 통해 과거의 장식적 어휘는 모습을 바꾸었을뿐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모던 이후 건축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장식적 어휘는 기존 바로크나 로코코에서의 장식처럼 건물에 덧대지거나 부속처럼 넣어지는 카탈로그 데코레이션 같은 것과는 다르다. 이러한 텍토닉의 변화는, 20세기 사회 문화 예술계의 수많은 프로파간다의 홍수 속에서 전통적 미학의 관점이 새로운 관점으로 변화한 것과 괘를 같이하는 것으로 장식이 건축물의 내 외부를 뒤덮는 표피에서 머물지 않고 전체 건축을 만들어내는 구성적 아이디어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물론 오스트리아 분리파나 아르누보처럼 과거의 기능공적 장식이 모더니티와 결합되는 순간도 있었지만, 특히 러시아 구성주의나 스틸의 합리주의 기능주의적 사고 안에서 미적 감수성을 발견 있다면 모더니즘의 합리적 사고 안에서 지어졌다는 건물이 사실 얼마나 미적인 고려를 통해 지어졌는지를 알아차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꼬르뷔지에의 도미노 (1914) 단순하게 건축물을 구성하는 최소한의 단위로, 조립을 통해 무한히 재생산 있는 기계로서의 건축을 가능하게 했다고 보는 것은 모더니티에 입각한 의견인 것은 맞지만, 도미노를 통해 건축이 기둥과 슬라브 , 구조와 구조를 둘러싼 외피 그리고 내부에 놓인 오브젝트들로 구성이 되는 것임을 밝힘으로써 전통적 오더와 질서로 이루어진 과거의 건축과 결별하고, 이들 요소의 조합을 통해 건축이 무한한 방법으로 변주될 있음을 보여주었음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 이는 다시 말해, 당시 유럽을 휩쓸던 조지안 스타일이 가졌던 양식적 한계에서 벗어나 건축가가 실제 건축물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그의 미적 취향과 개성에 맞춰서 얼마든지 장식적으로 조합하여 건물을 지을 있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건축가의 개성을 보여주는 창조적 정신이 모던에 와서도 얼마든지 유지되었음을 뜻한다.

물론 모더니티가 힐버자이머의 하이라이즈 시티 (1924) 보이듯 개인을 집단적 이성으로 대체 치면서 인간성을 배제하려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인간성이 배제되면서 개인의 창조적 영역도 함께 축소된다. 그래서 그의 투시도 건축가의 역할이라는 것은 (적어도 창조적 정신의 측면에서) 어떤 형태로든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실현되지 못한 유토피아의 아이디어들은 결국 모더니즘의 어휘로 남았을 뿐이고, 이후 모더니즘은 스스로 익명성의 위협에서 벗어나려 했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아르네 야콥슨의 SAS Royal Hotel 로비나 미스반데로에의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에서 보이듯이 모던의 어휘로 만들어진 공간은 어떤 이상적, 집단적 기준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매우 장식적이고 세속적이다. 건축가는 이제는 심각한 표정으로 모던을 말하지 않아도 되고, 모던의 어휘는 널리 쓰이는 장식적 언어의 일부가 되었다.

 여기서 현대의 장식이 클래식한 장식과 구분되는 점을 든다면 첫째로 클래식한 장식이 건축물의 구축과는 상관없이 구축되어 있는 것의 여백을 메우기 위한 점적 인 이었다면, 이에 반해, 현대의 장식은 구축의 요소, 구축의 방법론, 그리고 구축된 형태에 속한다. 우리는 건축물의 구축된 형태를 보면서 자체로도 미적 감흥을 느끼지만, 건축의 요소들이 건축가의 구성적 논리를 통해 구축된 형태로 변태하는 과정을 미적으로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선형적인 경험자체가 매우 장식적이다.

 이러한 장식의 차이점은 사실 구축의 이야기를 놓는 다면 어쩌면 비슷한 이야기 있다. 그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현실성의 제약에서 벗어났을 때 건축적 선택의 많은 이유가 건축가의 내적 기호를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크로 넘어가기 직전 하이 르네상스 시기의 매너리즘 건축가인 줄리오 로마노(1499-1546)  만투아 팔라조 (Palazzo Te Mantua) 통해 보여지는 장식들,  가짜 기둥과 창문이 입면에 투사되어 붙는 다거나 실제 구조와 변주되면서 다른 리듬을 만들어 내는 것들은 실제 건축의 용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장식이 지나치게 과다인 경우로 마치 건축이 장식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하지만 건축가의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의 결과로 만들어진 이러한 건축물이 룰을 따지는 엄숙주의 안에서도 존재했고, 더불어 이성주의와 사회적 규범에 대해 긴장감을 만들면서도 대중에게 평가 받고 사회적 지지를 받는 다는 점은, 현대 건축이 흔히 보여주는 이유 없음이 사실 건축가의 미적 고려의 이유 있는 결과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독립적 룰이란 말로 치환하고 사용한다 해도 사회적 함의에서는 다를 없을 것이다.

 구축의 방법으로서 드러나는 장식에 대해서 좀더 이야기 하자면, 건축물의 구조를 통해 느끼는 장식적 감각은 건축물을 구성하는 논리적 결 계를 이해하면서 느껴지는 정서적 교감이다. 이에 대해 꼬르뷔제의 스승이자 철근 콘크리트 건축의 아버지 격인 오귀스트 페레 (1874 -1954) 다음과 같이 말한다.

"One must never allow into a building any element destined solely for ornament, but rather turn to ornament all the parts necessary for its support."

그래서, 오귀스트 페레는 그의 건물Esder Making workshops (1919)에서 건물을 지탱하면서 대공간을 만드는 논리로써 아치를 드러내거나, Saint Joseph’s church (1945-1956) 주탑을 지을때 내부에서 바라 봤을때 순수한 구조 미가 드러나도록 공간을 구성하였다. 물론 여기서의 구조의 장식적 아름다움은 구축의 방법을 명징하게 드러냄으로써 알아 차릴 있는, 심지어 도덕적이기 까지한 구조의 쓰임이다. 하지만 20세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는 동안 구조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건축가는 그들의 의도에 따라서 구조를 편의적으로 사용할 있게 되었고, 건축가는 구성의 논리적 어휘로서 구축의 방식을 자의 적으로 두드러지게 하거나 감춤으로써 그의 의도나 취향을 보여주는 시도를 하였다.


 예를들어 이십 세기 중반, 새로운 구조 기술이 만들어지고 시도될 때는, 구조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것이 건축가의 창의성을 드러내는 좋은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피에르 루이지 네르비의 공간 구조들, 벅민스 플러의 지오데식 구조 스터디, 벽돌과 리바의 인장력을 이용해 극단적으로 얇게 만든 엘라디오 디에스테의 쉘구조, 펠릭스 칸델라의 표현주의적 구조 스터디 많은 구조들이 있는 논리적 결과로서의 구조를 그대로 보여주는데 치중을 하였다. 그리고 구조가 기술이 현재에 이르면서는 구조적 성취보다 구조를 다양하게 변주하려는 시도가 많아졌다. 발레리오 올자티 , 크리스티안 케레즈 같은 건축가들은 구조 기술자들과의 협업을 통해서 일반적 구조를 낯설게 하면서 새로운 공간적 분위기 재구성을 하려 하는 시도들을 하였고, 그래서 구조를 교모 하게 비틀고, 삭제하거나, 혹은 층마다 위치를 바꾸는 식의 시도를 하였다. 또한 류엔 니시자와의 건물들처럼 매우 미니멀하게 구조를 사용하기 위해, 오히려 복잡한 알고리듬으로 숨기기도 하고 후지모토처럼 반대로 구조를 극단적으로 많게 하거나 필요이상으로 복잡하게 하여 무엇이 진짜 구조적인 역할을 하는 읽어 없도록 하는 경우도 있다. 헤르조그 드메룬의 베이징 올림픽 스타디움 (2008) 같이 좀더 컨템포라리한 예들은 마치 전통적 구조 읽기 자체가 불가능 해진 채로 기존의 텍토닉의 원리와는 전혀 상관 없이 구조가 스스로 장식이 되어 전체의 건물이 느스한 바운더리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뒤에 설명하겠지만 건축에서의 디지털 툴의 발달로 건축 디자인의 흐름이 전체적 구성의 아이더어로서의 텍토닉한 접근보다는 건축물의 표피가 좀더 중요한 것처럼 집중을 되면서, 자하 하디드나 힘멜블라우의 건축물처럼, 구조와 표피가 하나가 되거나 구조 안으로 표피가 숨어들어가면서 결국에는 무엇인지 구분할 없게 되는 마치 동굴과 같은 공간을 만들어 지기 시작했다.

 현대와 과거의 장식의 두 번째 차이점은, 클래식한 장식에서는 각각의 장식물이 저마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장식이 있는 건물은 그래서 내러티브를 만들어낼 있었고 이를 통해 사용자는 건물의 성격, 용도, 건축주가 누구인지, 그리고 심지어 건축가의 개성 까지도 읽어낼 있는 매우 심볼릭하고 기호학적인 미디어가 되었다. 이에 반해서 현대적 의미에서 건축 장식은 리온 크라이어가 그랬듯 클래식컬한 오더를 일부러 차용하지 않는 아무것도 의미 하는 바가 없다. 오히려 추상성으로 인해 반대로 사용자는 건물에서 의미를 읽어낸다기 보다 각각 자신의 느끼는 의미를 건축물에 투사할 뿐이다.

 위의 주장은 사실 70, 80년대 포스트 모던 건축 기에는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된다.  건축 평론가인 찰스 젱스가 다음과 같이 주장 했다.

모더니즘에서는, 다색 채색법, 은유, 유머, 심볼리즘, 그리고 관례가 색인에 놓여졌다. 그리고 모든 형태의 장식과 역사적 예시가 금기시 되었다.”

장식은 모던이 금기시한 리스트에 있었고, 포스트 모던에서 새롭게 재생할 중의 하나 였다. 그리고 로버트 벤츄리도 그의 ‘ learning from Las Vegas’ 나오는 오리나 빌보드 사인을 통해 장식의 관점을 들먹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장식 자체가 포스트 모던의 흐름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장식 자체는 포스트 모던이 이슈로 삼은 새로운 타이폴로지, 구성 그리고 상징적 가능성 들에 비해서 매우 마이너 한 것에 속했다. 그래서 현대 건축의 갑작스런 장식의 회기의 학문적 근거로써 포스트 모던을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현대 건축에서의 장식 회기는 학문적 흐름이 아니라 구십 년대 중반부터 급격하게 보급되는 컴퓨터를 이용한 건축 디자인에서 기인 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렉 같은 사람이 컴퓨테이션 건축과 디지털 페브리케이션이 새로운 장식적 가능성을 알아차리고 초기에 건축 디자인의 획기적인 전환점으로서 여기고 몇몇의 에세이를 통해 확인 정도를 했을 뿐이다. 그만큼 툴의 발전은 혁명적이고 가능성을 알기 위해서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러한 강력한 디지털 건축의 파급력으로 인해 건축가는 손쉽게 구현하기 힘들던 형태를 구현할 있게 되었고, 대중도 그 동안 존재하지 않던 공간을 향유 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의 장식이 의미가 없는 것은 사회가 표면적으로 계급이 없는 민주사회이기 때문이다장식을 한다는 것은 건축물에 추가적으로 하는 추가적 자본이 없으면 안되는 것이고 이는 권력과 자본의 속성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혁명 이전의 장식들이 궁궐, 귀족의 대저택, 종교 건축, 관공서에 집중하는 이유이고 유산계급의 확산과 더불어 장식또한 대중에게 퍼져 나간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당시의 대중들은 건물을 치장하기 위해 자신만의 장식을 만들어내는 대신에 기존의 귀족들의  장식들을 흉내 낸 디자인을 이미 만들어 놓은 카탈로그에서 고르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래서 장식이 가지는 의미들은 사회적으로 확대 되었고 동시에 퇴색 되었다. 그리고 현재, 더 이상 권력이 과거처럼 국가나, 특정 개인, 소수의 집단에 사유화 되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건축 디자인을 선두하는 공공건축물 (극장, 관공서, 도서관 뮤지엄) 대중은 대상으로 하는 상업 건축물의 디자인은 이상 특정 집단을 상징하는 내러티브를 가진 장식들로 뒤덮이지 않는다. 대신에 의미 하지만  누구에게나 어필하는 구조와 표피를 만드는 쪽으로 발전을 했다.

앞서 나는 이십세기 장식의 변화를 이야기 하면서 장식은 건축가의 창조적 에너지를 통해 다른 형태로 변화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변화 했다기 보다 장식과 장식적 행위로 구분해서 발전했다고 주장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디지털 건축의 득세로 인해 건축 물을 만들때 구축의 논리를 구성하는 텍토닉한 접근 약화, 건축물에 추가적으로 붙어서 외피를 형성하는 이십세기 이전에 장식의 문화가 현대에 그대로 재현되었기 때문이다. 프랭크 게리의 빌바오 구갠하임 뮤지엄 (1997) 대표적으로 디지탈 건축의 구조보다 표피에 집중하는 경향은 표피를 구성하는 다양한 텍스쳐의 개발, 새로운 메터리얼의 적용, 다양한 패턴과 위상 기하학적 형태를 만드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이는 다양한 건축적 예들로 확인 있다. 하지만 현재 컨템포러리한 동굴의 건축들 중에는 표피와 구조를 구분 짓고 이야기 하기에 모호한 건축물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장식과 장식적 행위를 구분하는 주장을 유보해 본다.

결론적으로 장식 (Ornament) 인간이 공간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림을 그리고 화분을 놓으면서 시작했을 이러한 행위는 이제 장식적 성격 (Decorative character) 넘어서서 진화하고 있다. 기존의 장식이 표피의 레벨에서의 표현으로써 사회적 관심을 얻고 그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진화했다면, 앞으로의 장식은 매우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익명인 디지털 문화 속에서, 사회,문화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능동적으로 대중에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면서도 민감하게 자신을 자각하고 표현하는 미디어로 발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