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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September 18, 2016

Surface City


표층도시

1.

서울의 얼굴을 제대로 보긴 시작한 것은 아마도 서울시 광고물 가이드라인 제정’ 이후 였다. 가로변 건축물의 입면을 가득 메우던 간판 뒤로 숨어있던 건축물의 본래의 껍질이 드러나자 도시의 풍경은 바었다. 오랫동안 간판이 있던 탓에 표면의 색이 군데군데 달라져 있었지만 벽돌의 질감은 온전히 드러났고 군데군데 이 빠진 듯 탈락한 타일로 덮인 건물은 재색을 내고 있었다. 신경 써 만들었을 아치모양의 창문도 간판에 가려 있을 때는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아름답다라고 수식 할 수 없어도 무심히 서 있는 건물들이 만들어 내는 집합적 경관은 오랜 타지 생활 후 돌아온 저자에게 이 도시에 대한 이전과는 전히 새로운 느낌을 주기 시작했다. 텍스트가 사라지자 (정확히는 도시의 표면을 잠식하던 글자들과 그 글자들이 놓였던 플라스틱 발광판이 사라지자) 도시는 역설적이게도 그 텍스트를 담아 낼 본래의 배경을 드러낸 셈이다. 이로서 도시의 표피에 타입이 어떻게 놓일 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 할 수 있게 됐다.  

정보기술의 발달에 기반한 새로운 시각 문화 컨텍스트에서 도시의 이미지는 그 목적과 의도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고 활용된다. 고정적이던 전통적인 도시에 대한 이해 방법은 새로운 기술 인간, 그리고 도시의 관계의 재구성 안에서 새로운 대안을 찾게 되었다. 모든 정보는 쪼그라들었던 풍선처럼 존재하다 어느 순간 부풀어 올라 모양과 부피를 가진 도시의 표피 위로 압착되어 음영없이 존재하고 이러한 시각 이미지는 개인 미디어의 표피에서 선택적으로 재소비 된다. 이러한 도시의 이미지는 속이 비어있는 채 표피만이 발광하는 허구이지만 실재보다 더욱 방대하고 손쉽게 정보를 준다. 정보는 상상하듯 실재와 동일하지 않을 수 있지만 상징에 대한 의심만 없으면 자아의 분열 없이도 실채를 이해 했다고 믿게 된다. 

최초로 도시의 표피를 보게된 나는 아이러니 하게도 보이는 실재가 아닌 미디어를 통해 도시를 더 잘 이해 했다고 믿게 되는 거다. 고대 도시를 이해하고 싶었던 르네상스인 지암바티스타 놀리(Giambattista Nolli)는 로마를 이해하기 위해 도시를 솔리드와 보이드 관계로 나누고 꼼꼼하게 색을 입혔다. 현재의 미디어가 좀더 복잡하고 좀더 실제처럼 보이도록 바뀌었을 뿐 도시를 이해하기 위해서 또 다른 미디어를 이용하는 것은 그대로다. 고정된 실체로서의 도시도  거리로 나서서 대담하게 남의 집의 문을 열고 그곳에 들어가서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지 않고서는 재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그럴 시간도 그리 해야 할 이유도 없다. 결국 도시를 이해하는 것은 미디어 든 실재 든 눈과 손이 닿는 표면을 통해서 이루어 질 수 밖에 없어졌다. 그 안에서 건축가는 실재를 좀 더 허구(환상)처럼 만들어 내든지 허구를 좀더 사실처럼 보이게 하든지를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오랜 기간 건축물의 입면이 내부를 반영해야 한다는 도그마가 깨진 지금 타입이 해야 할 일은 일견 분명해 진다. 

타입은 기존 미디어의 연장이고 다른 미디어로 확장되어야 한다.      

 2.

공간은 북쪽에 6미터 도로를 바라보는 1층에 위치해 있다. 설계회사인 공간은 책장과 책상과 컴퓨터만이 있을 뿐 그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짐작 할 만한 어떤 것도 없다. 일층이라고 해서 창을 통해 무엇을 전시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것을 팔고 있지도 않다. 간판이 있어야 할 곳은 비어 있고 북향인 탓에 내부는 어두워서 밖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그 마저도 커튼으로 닫혀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려주지도 알아달라 하지도 않는다. 공간을 설명하는 것은 공간의 내 외부를 나누는 유리 새시틀의 교차 부에 붙어있는 작은 간판에 쓰여진 회사의 영문 이니셜과 동일 한 이니셜이 음각으로 새겨진 콘크리트 포스터가 창의 안쪽에 매달려 있는 것이 전부이다. 영문 이니셜은 그 자체로 알파벳의 나열일 뿐 어떤 것도 설명하지 않고 그 마저도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발견해 내기도 쉽지 않다. 그렇다고 이러한 그래픽이 무엇도 의미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래픽은 분명 회사의 간판이고 여기가 설계회사임을 직시한다. 단지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작동하지 않을 뿐, 다른 미디어를 통해 설계회사의 존재를 알고 그곳이 이 도시의 어느 곳을 점유한다는 것을 안다면 이 간판은 현실에서의 좌표 점처럼 작동 한다. 다시 말해 그래픽은 일차적으로 현실 공간에 존재하지만 소리쳐 나를 알리려 하지 않고 미디어에 의해 이차적으로 재생산된 이미지로 소비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디지털 미디어 속에서 간판은 세계를 지각하고 인식하고 이해하기 위한 선험적 조건으로 존재하고 유일무이 한 실재에 아우라는 더하게 역할을 한다. 이 또한 결국 공간 속 프로그램의 성격이 불특정 다수의 관심 보다는 다른 매체를 통해 관심을 가지게 된 누군가의 리서치가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겠다. 

3.

공간이 있는 건축물의 표면에는 소위 말하는 간판이라고 지칭할 만한 설치물은 없고, 앞서 말했듯이 회사의 이니셜이 쓰여진 설치물이 건축물이 원래 가지고 있던 알루미늄 새시의 표피에 얇게 붙어서 존재한다. 설치물은 타입이 놓이기 위한 새로운 배경이지만 기존 건축물의 지오메트리를 그대로 따름으로써 지오메트리의 이질적 집합으로 보이지 않도록 다. 정확히는 전면 창과 출입구를 나누는 새시의 십자부 위에 놓여 있기 때문에 설치물 역시 러시아 정교회 평면같은 십자형의 형태를 가진다. 이를 다시 건축물의 스케일로 환원한다면 건축물의 표피는 대지가 되고 설치물은 건축물 된다. 그래서 건축물을 세우듯이 대지의 위상 하를 파악을 하지 않고서는 대지 건축과 같은 설치물을 디자인 할 수 없게 된다. 설치물은 그 자체로 특정 스케일의 건축 모형과 같고 대지에 놓이기 전에는 그 자체로 건축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 건축물은 중심을 향해 열려 있는 오픈 플의 공간이다. 네개의 다리를 펼쳐서 대지에 놓여 있으면 대지는 자연스럽게 4개의 공간으로 분절 한다. 그렇게 어느곳에서 다가오든 각기 다른 외부공간에서 건축물의 중심으로 진입할 수 있고, 중심에서는 방으로 뻗은 의 어느 곳이든 진입 할 수 있다. 각 방의 반대쪽 끝은 대지를 향해 열려 있어 어느 공간에서 바라보든지 각기 다른 풍경을 제공다. 건축물의 외피는 금색으로 되어 있는데 금색은 모든 색을 흡수해서 자신의 색으로 되돌려 놓기 때문에 은색의 대지 위에 놓여 있을 때 금속이 주는 질감의 통일성과 건축물과 대지를 구분하는 이질성을 동시에 획득할 수 있다. 현실의 스케일에서 설치물은 간판이 그러하듯 건축물의 표피와 외부세계 사이에 놓인 무엇이 되는 대신 건축이 원래 가졌던 외피 일부이면서도 타입이 위치할 배경을 기존의 표피와 구분해 주는 역할을 한다. 우연인 듯 4자인 회사의 이니셜은 십자평면의 각각의 끝에 놓이게 되었지만 그것을 시계방향으로 읽을 것인지 시계 반대방향으로 읽을 것인지는 정보가 없는 사람은 해석해야 하고 정보를 이미 가지고 있다면 알아서 할 일이다. 

 4.

오랜 기간 건축물에 타입이 들어오던 것은 주술적 벽화나 무덤의 관과 벽에 새겨진 왕의 신적 업적, 그리고 중세의 종교화 또는 왕족이나 귀족의 문양 같은 것들이었다. 벽화나 조각의 형식을 빌어 건축물의 영속성과 괘를 함께하던 타입은 건축물의 용도와 유주를 수사하는 장식적 요소들이었다. 이런 탓에 모더니스트들에게 기존의 장식은 구습의 가치로 없애야 할 것이었고 새로운 방식으로 대체되어야 할 것이었다. 구축과 상관없이 붙어 있던 모든 장식과 타입은 비도덕 적인 것이므로 건축물에서 탈락 되어야 한다. 더 이상 건축의 일부가 아닌 장식들은 그제서야 자기의 독립적 프레임을 가지게 되었고 언제든지 탈 부착 이동이 가능한 것이 되었다. 동시에 타입은 스스로의 영속성을 어떻게 획득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야 했다. 파괴 못 할 아우라를 가지던지, 필요에 따라 쉽게 대치 되도록 빠르게 소비되고 대량으로 복제가 되든지.     

한 동안 서울에서의 간판은 매우 포스트 모던적이었다. 구축과 상관없는 간판들의 조합은 건축물을 잠식하고 도시의 표면을 이루었다. 생소한 동양의 폰트들이 놓여진 원색의 배경들이 낮에는 모자이크 같다가 밤이되면 발광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기묘한 풍경은 이방인에게 본적 없던 동시대적 지역성을 내뿜고 있었다. 하지만 건축가 누구도 이러한 풍경을 의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사숙고 해서 고른 건축물의 표피가 자본주의의 수사적 욕망에 뒤덮  것이라 짐작은 했어도 이렇게 까지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21세기가 되서야 서울의 경관규제 통해 건축물 를 덮던 간판들을 넝쿨을 잘라내 듯이 제정비 했다. 그렇게 숨어 있던 건축물의 원래 표피가 드러나자 도시의 경관이 바뀌기 시작했다. 표피를 통해 우리는 촉각과 시각으로 우리의 경험과 세계를 통합할 수 있게 되었다. 

설계회사의 간판은 장식이라기 보다 구축의 일부가 되려 했다. 그래서 간판의 독립적 프레임은 사라져야 고 타입이 놓이기 위해서는 건축물의 본래 지오메트리 가지고 와야 했다. 마치 대지위에 건축물을 세울 때 그러하듯 사이트와 주변의 콘텍스트를 읽어내야 하는 작업이다. 간판이 건축물의 연속된 일부로 존재하자 타입도 건축물의 일부가 된다. 이렇게 타입이 실재성을 가지자 건축물이 그러하듯 주체를 둘러싼 공간이 만들어 내는 주변적 시선이 타입의 실존에도 영향을 미친다. 즉 우리 공간에서 타입은 초점을 맞추어 해석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무의식 적이고 주변적 지각을 통해 함께 느껴지는 공간적 분위기의 일부이자 몸을 통 경험 하는 것으로 변화한다. 오히려 간판에 초점이 맞추어지면 공간에서 우리는 밀려 나가고 재생산된 이미지만이 다른 미디어로 확대된다. 이것이 설계회사의 간판이 전통적 장식물럼 공간을 설명하지도 수사 하지도 않는 이유이고, 간판이 그런 일을 할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이 텍스트는 티포찜머 5호를 위해 쓰여진 글임을 밝혀둔다.)